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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순환 착한도시

2011년 5월, 구미 단수사태 르포 (김수민 기고)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이라는
인권 관련 잡지에 기고한 르포입니다.




구미 단수사태, 5일의 기억

김수민 | 구미시의원

  


“TV 좀 틀어줘요. 50번요, 50번.”


사무실을 방문한 아기 엄마가 만화 채널을 부탁했다. 수자원공사와 구미시를 상대로 한 단수피해 시민소송단 1차 모집 마감일이었던 5월 31일, 사무실은 급히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고 유난히 아기를 안고 온 어버이들이 많았다. 어느 세 자녀 가정의 어머니는 과감히 아기 한 명을 내 품에 안기기도 했다. 나는 법무법인 ‘경북삼일’과 함께 소송단을 모집한 구미풀뿌리희망연대의 운영위원이었고 지역구 사무실인 ‘풀뿌리사랑방’은 그 접수창구 중 하나였다.


5월 13일 시민소송에 돌입한 직후 동네 주민들의 열기는 들끓었다. 평소 지지해주던 분들에게서 “(소송장을) 열심히 돌리라”는 독촉 전화가 걸려 왔지만, 사무실이나 내 휴대전화로 오는 문의도 만만치 않았고 사무실에 밀려드는 방문객들에게 소송의 취지와 과정을 설명하느라 내 발걸음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힘들었다. 내가 소송장 한 부를 건네면 바로 “한 10장 달라”는 주문이 돌아오느라 인쇄하는 일이 가장 바빴고, 사무실 앞에 비치한 소송장도 금세 동이 났다.


처음 며칠간은 주민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첨부할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데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편 이 단수의 배경이 된 4대강 공사에 불똥이 튈지 모른다며 긴장하거나 일단 지켜보던 이들은 ‘별 거 아니네’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숨을 돌리던 바로 그 시각, 동네에서 나름의 인맥을 자랑하던 아주머니들까지 합세해 시민소송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1차 모집 마감을 일주일쯤 앞두고 참여는 불붙기 시작했다. 마감일인 5월 31일 낮, 한 공무원에게서 “시민단체가 가가호호 방문해서 시민소송 위임장을 받고 있느냐?”며 연락이 왔다. “시민단체 형편상 그게 가능하지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구미시 관계자들은 단수피해 시민소송에 대해 별 언급하지 않았고 관계자들은 입을 열어야 할 기회가 있으면 그저 “중립”이라고만 말해왔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지자 계속 포커페이스를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송의 목적은 돈 몇 푼 받고자 함이 아니었다. 시민소송단 모집을 공지한 시민단체가 아니라 참여 시민들이 그랬다. 그들의 펜은 분노였고 소송장에 적어 내려간 건 시민적 권리였다. 예상 손해배상액을 물어오는 시민은 숱했다. 그러나 “얼마가 될지 모른다”는 답에 동요하는 참여자는 없었다. 헛소문이 퍼져 “등본을 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준다면서요?”라고 물어오는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라는 답을 들으면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정리 작업을 거쳐 6월 23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 접수한 소송장은 17,649명의 항의를 담고 있었다. 참여 인원을 축소해서 예상하거나 전파했던 이들의 당혹스러움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소송장을 접수한 풀뿌리희망연대와 법무법인도 놀랐다.



어버이날 터진 단수사태


5월 8일 낮, 나는 출신 학교의 동문회 행사장에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자리에 참석한 구미갑 지역구의 국회의원을 홍보하기 여념 없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못 본체했다. 이날 새벽 5시 30분, 수자원공사가 해평에서 운영하는 구미 광역 취수장에서 취수용으로 설치한 보가 무너졌다. 4대강 공사로 인해 물살이 빨라진 지역이었다. 물을 획득하지 못한 취수장측은 오전 7시 30분부터 가동을 중단했다. 이 자리의 아무도 단수사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몰라서였을 것이다.


시의원인 나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참석했던 구미시장의 속내는 어땠을까? 국회의원은 알고 있었을까?


자리가 지루해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한 지역 언론 사이트에 접속했다. 사태의 대강을 처음 파악한 순간이었다. 행사장을 떠나 나의 집이 아닌, 행사장 가까이 있는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 댁은 아파트 물탱크 덕분에 물은 쓸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나는 가수다’를 시청하고 있는데 상하수도사업소에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취수중단에 따른 단수안내입니다. 해평취수장 임시보파일 일부유실로 구미시 전 지역 생활용수 및 2, 3, 4공단 공업용수가 공급 중단되어 긴급복구 중으로 저지대는 5월 9일 08시, 고지대는 5월 9일 22시에 공급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문자를 받은 시간이 오후 6시 33분이었다. 사태가 터진지 13시간이 지나 발송한 것이다. 그것도 시의원쯤 되어야 볼 수 있는 메시지를.


5월 9일 아침, 나는 다시 지역구로 향했다. 시의회 산업건설위원들은 이날 사건현장인 해평취수장을 다녀왔다. 기획행정위원으로서 방문자에서 빠진 나는 ‘사건이 이 지경인데도 상임위를 따지냐’며 속으로 격분했다. 물론, 잠시였다. 의회 사무국이 스물세 명 의원에게 일일이 다 연락해 모아갈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다. 여럿이 간다고 사태가 더 빨리 수습될 것도 아니었다.


구미대교를 건너 나의 지역구인 인동동, 진미동으로 접어들었다. 공사로 파헤쳐진 낙동강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때도 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공장지대를 지나 상가로 들어서자 점차 단수사태가 피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문을 닫은 곳이 속속 발견되었다. 상당수 식당들은 이미 어버이날과 석가탄신일 대목을 놓쳤을 것이다.


지난해 말 내 지역구의 탁수 사태를 떠올렸다. 상하수도사업소의 설명으로는 저류지 청소 과정에서의 실수로 녹물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분상 먹을 수 없는 물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주민들은 처음엔 노랗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검게 변하는 그 물은 “이미 시각적으로 오염된 물”이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탁수가 쉽사리 걷히지 않자 내게도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인동동, 진미동에는 구미시에서 가장 많은 영·유아들이 살고 있다. 그 어버이들에게 수질은 가볍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소변을 누고 변기 물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오해한 아주머니가 아이와 아이 아빠를 연이어 꾸중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런데 아예 물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항의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평소 낯이 익은 주민들의 문의만 있었다. 불안해졌다. 면전에서 욕을 먹는 편이 나았다. 오후에 인동동 내 농촌지역인 구평2동 경로당을 방문했다. 문이 잠겼다.


인동동내 구평동 ㅂ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운영하는 자치도서관에 들렀다. 자원봉사자들은 주로 초등학생 어머니들이었다. 물탱크에 의존하던 아파트단지들도 사태가 길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단수사태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까지야 연휴긴 한데, 내일도 물이 안 나오면 어떡하죠? 학교급식은 정상적으로 될까요?”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소식도 들었다.


“어머, 지금, 어제 ‘나가수’에 나온 ‘임재범 빈 잔’이랑 ‘구미 단수’가 인터넷 검색순위 1, 2위를 다퉈요.”
아파트 단지 곳곳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자치도서관을 나온 나는 아무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작년 선거운동이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되었다. 말을 걸 이유가 있었고 주민들은 내게 말 걸 기회가 생겼다. 뜻밖에 다들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내가 ‘야당 의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민들은 처음부터 ‘4대강’을 의심했다. 사람의 발상이라는 게 비슷비슷한가 보다. 세탁소 아저씨는 ‘집단소송’을 거론했다. 페이스북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어느 분도 마찬가지였다. 구미시 시민사회단체와 야권의 연대단체인 구미풀뿌리희망연대는 신속하게 소송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ㅂ아파트단지를 나오는 내게 주민들은 “소송이 시작되면 바로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4대강으로 시작되는 육두문자들


저녁시간이 되었다. 나는 석가탄신일 기념으로 열리는 산사 음악회에 불참했다. 오후 7시경 인동동 주민센터 앞에 물통을 든 주민들이 줄 지어 섰다. 인동시장을 경유하고 온 나는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주민센터와 시장 일대는 곧바로 물을 당겨 올릴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날 아침 인근의 목욕탕 앞에서도 주민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주민센터에 들어섰더니 공무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팩스로 ‘전 직원 1/2 비상근무령’이 떨어지기 앞서 이미 그들은 전원 비상근무에 돌입하였다. 한숨을 쉬던 주민센터 사무장은 애써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배고파지면 맛있는 야식시켜먹고, 일하다 힘들면 ‘사무장 개새끼 소새끼’라고 욕 좀 하면서 풀어요.”
주민센터는 물통이 없는 주민들에게 물통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한 공무원이 웃었다.
“물통 중에 돌아오는 건 별로 없을 겁니다. ‘보상’해드린다고 생각해야죠 뭐.”


밤에는 진미동 자율방범대원들과 함께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순찰을 도는 날이었다. 방범대장은 도보 근무를 제안했다. 거리엔 생각보다 문을 연 술집이 많았고 손님들이 붐볐다. ‘물도 안 나오는데 술이나 마시자’는 생각에서였을까. 우리 동네에 사는 한 시민운동가는 단수사태 와중 페이스북에 ‘물’을 ‘술’로 잘못 적은 문장을 올렸다. “집구석에 술이 안 나오니” 그도 은연중에 물도 안 나오는데 술 생각이 간절했던 것일까. 수질이 나쁜 나라에서 맥주 제조가 발달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상가에서 거주지로 발걸음을 옮기자 목마른 골목골목이 나타났다. 얼마 전 봤던 <눈 먼 자들의 도시>나 좀비가 나오는 영화들을 떠올렸다면 과장이겠지만 하루아침에 비상을 맞이한 도시의 급소들이 드러났다. 행인들은 순찰 복장을 입은 방범대원들에게 급수계획을 포함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만한 정보가 없었다. 아파트 쪽은 그래도 나았다. 진미동에 있는 아파트단지 두 군데는 지하수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고 힘겨움을 나누며 상의할 이웃이라도 있다. 반면 진미동 가구 수의 절반을 육박하는 원룸 쪽은 집집마다 홀로 대응하기 바빴고 동네가게에서 파는 생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원룸 골목에서 마주친 부스스한 몰골의 한 아주머니는 ‘4대강’으로 시작하는 육두문자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방범순찰이 끝난 뒤 진미동 주민센터에 들러 철야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위로했다. 철야보다 그들에게 더 힘든 건 주민들의 반발과 욕설이었다. 시청에 전화를 걸어 시원찮은 답변을 들은 주민들도 주민센터에 화풀이를 했다. 주민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무원들의 숙명이었다. 청와대는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가? 일선 공무원들이 ‘직장 상사’를 잘못 만나서 이 무슨 고생인가.


“나도 공무원이자 주민인데, 구미시에서 예고 없이 이렇게 길게 단수가 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욕하시는 걸 이해해야죠.”
“우리 월급에는, 껄껄, 욕먹는 비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 공교로운 사연도 들었다. 진미동 상가에서 유일하게 물이 나와 주변에 물을 공급하는 ‘센터’ 역할을 톡톡히 한 집이 있었는데 주민센터 한 공무원의 부인이 운영하는 상점이었다. 그런 사연들을 나누며 조금씩 웃고 풀었다. 주민센터 복지담당계장과 그간 미처 나누지 못한 동네 현안들 이야기도 했다. 이 시각, 다른 사람들도 꼭 분노만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니었을 터이다. 나는 이웃과 함께 해학과 웃음으로 사태를 견뎌내는 주민들을 숱하게 보았다.



단수사태로 드러난 부조리한 도시문명


5월 10일 오전 11시 정각, 밤새 동네를 돌고 눈을 붙였던 나는 칙 하는 소리에 깼다. 나의 원룸에 물이 들어온 것이다. 일단 머리부터 감았다. 부근에 사는 이웃들에게 문자메시지가 속속 날아왔다. 물이 나온다는 안도감과 다시 끊어진다는 소문이 섞여 있었다. 부끄럽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현재 진미동에는 대부분 물이 나옵니다. 다시 끊어진다는 근거는 없습니다만, 방심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진미동의 단골식당에서 점심으로 뼈다귀해장국을 들었다. 이곳도 역시나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대목을 놓쳤다고 했다.


무분별하게 원룸이 지어지고 대다수 거주자가 외지 출신 젊은이들인 탓에 주거여건 개선이 힘들었던 진미동이었지만 단수사태의 손아귀에서만큼은 비교적 일찍 빠져 나왔다. 반면 구미시내의 선산읍, 무을면, 옥성면, 도개면, 장천면, 해평면 등 농촌지역은 그 시각에도 급수율이 제로여서 마을 곳곳의 지하수에 의존해야만 했고, 내 지역구에서는 인동동 내의 구평동과 황상동이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다른 구역보다 지대가 높았다.


지역구 사무실에서 구미 전체 상황을 챙기고 주민들의 문의에 답하던 나는 저녁 인동동 주민센터를 방문했다. 물을 받으러 주민센터 앞에 늘어선 줄은 여전했다. 한창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변기물이 떠올랐다. 구미시민들이 배설물을 길가에 투척한다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으로 나돌았지만 나는 불법 쓰레기 투거로 몸살을 앓는 우리 동네 원룸 밀집구역에서도 그러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마주치는 시민들은 이렇게 털어놓곤 했다.


“생수를 사서 변기통에 붓고 있습니다.”
이 부조리한 풍경은 단수가 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괜찮은 질의 물을 배설물과 함께 버리는 부조리한 도시문명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빗물저류시설을 생각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이 빗물들을 다 흘려보낸 채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주민센터를 분주하게 드나들며 이웃을 위해 뛰던 통장 등 일부 주민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들면서도 내 마음은 그대로 빗물에 꽂혀 있었다.


나의 주의를 돌린 건 한 주민이었다. 주민센터에 거칠게 전화하던 그는 “찾아가겠다”고 했다. 여유롭게 “오시라”고 답변한 공무원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걱정을 표했다.


“의원님께서 좀 달래주십시오.”
이내 내 나이 또래의 남자가 등장했다. 불만이 가득했지만 오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어르거나 달래지 않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만 했다. 들을 수밖에. “진미동에 살다가 인동동으로 방 옮겼습니다. 운이 없는 건지 진미동 먼저 물이 나오네요. 둘째가 태어난 지 열흘됐습니다. 제가 없으면 우리 마누라가 물을 구해야 됩니다. 어떻게 구합니까?”


경북 지역의 소방차들이 구미에 모여들어 물을 공급했다. 주민센터 공무원들도 장애인이나 어르신들이 물통 옮기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행정력은 가가호호에 미치지 못했고, 이를 감당할 민간 풀뿌리공동체의 면모도 희미했다. 특히나 독거 어르신들의 처지는 정말이지 ‘서발턴’(그람시, 스피박 등이 사용한 용어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 타인의 시점과 언어에 의해 지워지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이어 말했다.


“그나마 우린 괜찮습니다. 제가 물 사서 집에 나뒀으니까요. 근데 다른 사람은 어떡하란 말입니까. 동네 여기저기 할머니들이 구루마 끌고 다닙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국가는 뭐하는 겁니까?”



국가는 뭐하는 겁니까?


분을 다스린 남자가 귀가하고 나서 나는 인동동 내 황상동 쪽으로 향했다. ㅈ아파트단지에 모인 사람들을 뒤로 하고 관리사무소 앞에 서 있던 소방차가 떠나고 있었다. 관리사무소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황급히 뛰어갔다. 주민들의 동요는 일순 극에 달했다. 소방관을 붙들고 물었다.


“언제 다시 옵니까?”
“우리가 여기 다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5분쯤 지나 또 올 겁니다.”
그 약속을 큰소리로 알렸지만 빗속의 주민들은 불신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소방관들에게 내 직분을 강조하기까지 하면서 오늘 자정까지는 최대한 소방차가 방문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소방차를 떠나보내고 나니 관리사무소 앞의 커다란 물통 몇 개가 보였다. 빗물을 받아두고 있었다.

인사하러 다가온 사무소 관계자와 동대표가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웃었다.


“이거 처음 샀을 때, 왜 사냐고 주민들한테 욕 좀 먹었거든요. 이젠 나도 어깨에 힘 좀 주겠네.”

소방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게 된 주민들은 어느새 ‘보도 통제’를 의심하고 있었다.


“초유의 사태 아닙니까? 근데 기사 떠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이런 목소리도 있었다.
“원인은 4대강 때문이잖아요? 그건 한마디도 없데.”
그는 조중동 구독자일 확률이 높다. 언론 보도의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툭하면 “몇시에 물이 나온다”는 당국의 안내를 그대로 받아써서 주민들의 혼란과 짜증을 가중시켰다. 나도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언론의 받아쓰기 행태를 비판했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언론보도는 믿지 말라”고도 했다.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기자들 몇몇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봤다며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밖을 돌아다니느라 미처 듣지 못한 에피소드들도 전해 들었다.


“어딘가에는 생수를 공급했는데, 그 상표가 ‘행복4강(江)’ 이라면서요,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청 공무원들은 아예 전화를 생까기로 작정을 했나 봅니다!”


즉석에서 향후 대책들도 주고받았다.


“의원님, 우리 아파트 내에 있는 공원이 시에서 관리하는 공원인 거 아시죠? 여기 민방위급수시설을 만들었으면 이 지경까진 안 왔을 겁니다.”
“손해배상 시민소송이요?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소방차는 비를 뚫고 약속대로 다시 왔다. 그러나 물은 금세 동이 났다. 떠나는 소방관들에게 주민들은 물었다.


“또 오긴 와요? 언제쯤이요?”
소방관들도 속이 타긴 매한가지였다.
“와야지요. 이렇게 많이 기다리시는데요. 꼭 오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왜 이리 물이 빨리 떨어질까. 가만히 지켜보니 한두 번 받아간 주민들이 또다시 받으러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소방관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조금 있다 다시 올 것’이라는 약속도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근거리에서 물을 받아 쓸 수 없는, 크고 넓은 상수도시스템에 깊이 의존하는 우리 시민들은 그 상수도가 타격을 받았을 때 이렇게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도시문명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자정, 마지막 소방차가 다녀가고 물을 기다리던 최후의 사람이 귀가한 그 시점, 나는 무거운 고민에 젖어 곧바로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단수사태와 4대강 공사가 남길 것들


5월 11일, 인동동 내 구평동도 지대가 높아서 단수가 현재진행형이었다. 잠시 급식에 차질을 빚었다는 ㅊ중학교에 들른 후 부근 ㅂ아파트단지를 쏘다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스스로 미친 사람처럼 여겨졌지만 또다시 의원임을 빙자(?)해 여러 주민들에게 현황을 묻고 의견을 나눴다. 그 사이 시민소송을 해야 한다는 여론은 홍수처럼 번져 있었다. 구미풀뿌리희망연대가 향후 대응계획을 확정하기 전이었다.


오후엔 다시 황상동 ㅈ아파트를 들렀다. 관리사무소에 전화가 빗발쳤다. 물이 들어오자마자 끊어지면서였다. 물이 먼저 나오던 1, 2층에서 수도를 너무 오래 튼 탓이다. 하지만 1, 2층의 시민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 오랜 단수기간을 거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를 ‘죄수’로 만든 거대한 딜레마일 따름이다.


11일 밤 우리 지역구는 전체적으로 급수가 재개되었다. 생수를 공급하러 구미를 찾은 춘천MBC 박대용 기자에게 나는 지역구 바깥의 다른 동네를 지목해 드렸다. 12일 저녁 7시 30분경, 의회사무국은 “구미시 정상급수”를 알리는 팩스를 보내왔다. 허나 우리 사는 세상은 정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얼마 전 터진 후쿠시마 핵사고가 매우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단수’라는 작은 딜레마에서는 벗어났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4대강 파괴공사’라는 거대한 딜레마 아래에서 ‘죄수’ 신세에 불과하다.


“‘4대강 공사하고는 연관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 아주 잘 들었습니다. 낙동강 공사를 하고 있는 데서 낙동강 공사로 물살이 빨라져서 벌어진 일인데 무슨 연관이 없다는 겁니까? 이게 무슨 지방하천에서 벌어진 일입니까?”


단수사태 이후 처음 의회에서 열린 의원간담회에 출석한 상하수도사업소 공무원에게 나는 화를 냈다. 그들은 4대강 공사에 투입된 포클레인이 직접적으로 취수용 보나 송수관을 파손하지 않는 이상, 취수장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든 무조건 ‘연관이 없다’고 발뺌할 기세였다. 교도관 노릇을 겸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죄수’였다.


5월 18일 구미를 방문한 <프레시안> 기자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시에서는 (단수사태와) 4대강 사업의 연관성을 부정한다. 구미시가 수공을 상대로 싸울 수는 있겠지만, 4대강 사업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지 않겠나. 문제의 본질이 4대강 사업에 있다는 것은 주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 입장에서는 만만한 게 수공인 것이다. 수공이나 정부나 4대강 사업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데, 그런 논리라면 4대강 공사의 본질을 본인들이 몰랐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준설로 유속이 빨라지는 것에 대한 대비 자체가 없었다는 게 아니겠나.”


6월 15일 <한겨레>가 입수한 문건에 의하면, 당초 4대강추진본부는 ‘대규모 준설로 강의 수위가 낮아져 해평취수장에서 취수가 불가능해질 수 있으므로 예방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4대강추진본부와 수자원공사는 낙동강 준설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임시보 규모를 대폭 축소했고, 이 임시보가 유실이 되면서 5일간의 단수사태가 발발한 것이었다.


단수사태가 끝난 5월 14일, 지역구에 있는 동락공원에서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결의대회가 열렸다. 시장과 국회의원이 참석하고 몇몇 인사들이 혈서를 썼다. 과학벨트사업의 타당성 자체를 의심하는 나는 불참했다. 과학벨트특별법은 외국인 업체 우대와 그에 따른 특혜 등 반(反)자치, 반(反)노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4대강 공사’와 ‘신공항’에 이은 국책사업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지방분권’으로 덧칠하는 사기극이었다. 대다수의 구미시민들은 과학벨트에 깊은 관심도 없었고 과학벨트 유치가 무산된 다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낙동강 중류를 낀 구미는 자연재해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지역이다. 널리 알려졌듯 낙동강 본류는 홍수와 무관하다. 그런데 정부는 홍수를 예방하겠단 명목으로 이러한 강에서 파괴공사를 자행했다. 2010년 봄, 준설토에서 날린 먼지는 이미 시민생활과 농지 여건은 물론 반도체 공장까지 위협하였다. 하지만 ‘신공항’과 ‘과학벨트’를 떠들던 그들 중 누구도 당시에 생산현장에 닥친 위험에 맞서지 않았다. 이제 4대강 공사를 홍보할 이점이 남지 않자 찬성론자들은 강변에 조성될 여가공간을 말한다. ‘떡고물’을 고대하며 입을 벌린다.


작년 말 구미시의회는 수상 비행장 실시설계 용역비를 전액 삭감함으로써 준설될 낙동강 옆에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백 수십억의 예산을 쏟아 붓는 해괴한 사업을 저지했다. 그리고 올해는 낙동강의 높아질 수위에 업히려 했던 수상스키, 선착장 사업을 일단 보류시켰다. 구미시의회에 4대강 파괴공사에 정면 반대하는 의원은 나를 포함해 겨우 셋뿐이다. 그러나 강력한 시민여론을 등에 업고 신중론을 펴는 의원들과 함께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얼마 전 남유진 구미시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수상 비행장’ 사업을 건의했다. 바로 그 해평취수장에서 송수관로가 파손되어 구미 일부 지역에서 단수사태가 또다시 터졌음에도 4대강 공사와의 결탁에 사활을 건 셈이다. 이제 남은 건, 유유히 흐르는 강을 건드리고 재촉하고 협박한 대가로 물이 나오지 않아 생활의 근간이 흔들렸던 나날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심판으로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