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구미터미널 그리고 민회 / 김수민


구미시민 대다수는 결코 남유진 시장처럼 광신적인 박정희 기념을 원하지 않습니다. 

민간에서 지지자들이 알아서 하거나 구미시가 주관하더라도 검소하게 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시장은 물론 야당, 무소속이 섞인 의회조차 23/23으로 

이 문제를 담합해서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민과 단체장, 의회간의 거리를 어떻게 풀까요?

저는 민회로 의회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고 꼽히는 문제들에 대해 관여하고 

의회의 담합과 단체장의 폭주를 견제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봅니다. 


한겨레신문 정기 기고 칼럼을 링크합니다. 


원문보기: 

http://hani.co.kr/arti/opinion/column/779301.html#cb#csidxc8223fe9293ffadb5c55ed46e3da29a 

Posted by 김수민
<의회사무국>
- 업무추진비 공개하고 있으나 홈페이지에서 찾기 힘들다. 잘 보이는 곳에 게재.
- 안건이 많거나 시정질문을 하는 날에 본회의 학생견학을 유도하고, 비회기면서 방학인 기간에 의회를 체험활동 공간으로 학생들에게 개방.

<기획예산담당관실>
- 한미FTA와 충돌할 여지 있는 조례에 대해 검토하고 대비. 중앙정부와 경상북도가 하지 않으면 시가 해야.
- 각종 위원회 위원, 공개모집절차를 통해 위촉
- 주민참여예산제, 집행부가 조례 제정 이전에 시범 시행 등 노력하지 않았다.
- 구 금오공대 부지 매입, 예비비 집행 부적정.

<녹색정책담당관실>
- 자전거-버스 환승 개념 도입
- 시민 정책제안 1차 심사를 각 과에 맡기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의 위험. 그리고 정책제안 수렴내용을 의회와 공유.

<문화예술담당관실>
-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생긴 학교 빈 교실을 작은도서관으로.
- 인동 3.1문화제, 독립운동기념의 원래 취지를 분명히 하라.
- 지난해 이어 또다시 조갑제닷컴과 구미시가 영남대 박정희리더십독후감 공동후원. 연구성과 부진하고 박정희일인 부각시키는 영남대 연구 1억원 지원 그만두고 시가 직접 연구에 나설 때. 학자들의 뻔한 소리가 아닌 그 시절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박정희시대 연구하라.
- 문화예술 지원 마인드 바꿔야. “단체에 지원”이 아닌 예술에 지원. 특정단체가 아닌 시민 일반을 위한 문화예술이 돼야.
- 지자체 최초로 창작공연 작품공모를 통해 공연을 추진한 것은 잘한 일. 이에 더불어, 청년층을 위한 길거리 및 원룸밀집구역 공연 아이디어를 공모.


11월 29일 문화예술회관 현장방문.


 
‎11월 29일 행정사무감사 지적 사항 요약

<정보통신담당관실>
- 구미시 어플 지속적인 개선.
- 가로등, 도로 재포장 등의 민원은 따로 접수하는 홈페이지 게시판 필요
- 올해 초 정보화교육 강사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집행부 공무원이 국책사업(4대강공사) 홍보를 정보화교육 중간중간에 하라고 주문했다. 논란 많은 사업을 왜 정보화교육을 통해 홍보해야 하는가?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아.

<홍보담당관실>
- 삼족오가 구미의 역사문화브랜드가 되는 것에 대해서 시 안팍에서 공감대가 없다. '전설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럴싸하지도 않다. 삼족오를 활용한다면 원래 익숙한 '금오'를 홍보하는 게 더 낫다. 삼족오 사업은 철회되어야 한다.
- '구미텐인텐', '구미아가맘' 등 시민이 수천 수만명 모인 카페들이 있다. 이런 사이트와 연계하여 행사나 시정 등을 홍보.

<문화예술회관>
- (새마을여성합창단이 연습실을 쓰고 있음을 확인한 후) 시립합창단 단원들이 쓰는 연습실인데 외부단체에서 쓰는 건 일단 원칙에서 어긋난 것이다.
- 회관 통로를 창고로 개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법개조라는 말도 들리는데 시정해야.

<시립도서관>
- 공공 작은도서관을 신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에 대해서도 시급히 도서 등을 지원해야.
- 구미시 청소년도서관을 '상모정수도서관'으로 정한 건 잘못. 시 차원의 시설이라는 점, 청소년도서관이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총무과>
- 구미시 장학금 지급내역에서 진학우수, 성적우수에 비해 저소득층 장학금 수혜자의 수가 적으므로, 저소득층의 기회균등을 위해 재조정.
- 고교평준화 등 구미시 교육발전에 관한 각종 여론이 있음에도 구미시가 이를 검토하는 노력이 부족하였으며, 이른바 명품고 육성사업에 있어서도 단편적·일방적 사고를 지양하고 관내 모든 학교들의 발전에 목표를.
- "공무원이 힘들면 시민이 행복하다"는 시정 모토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기 저하는 시민들의 불편으로 연결된다.


<새마을과>
- 새마을여성합창단이 문화예술회관에서 시립단원들의 연습실을 사용하는 것은 양 단체 상호간의 불편과 시공간적 제약을 초래
- 시민들이 당일 생업을 포기하고 민방위 교육을 받는 만큼 민방위 소양교육에 노동자와 소상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도록 검토하기 바람

<회계과>
- 시청청사 청소용역 직원들은 용역업체 교체에도 불구하고 집행부에서 고용승계노력을 하고 있으나, 근래 70세 이상 직원들에 대한 일률적 사직권고는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가급적 고용승계하기 바람
- 자투리 부지 활용방안에 대해 쌈지공원, 화단 이외에도 성장기 아동 가정이나 독거 어르신을 위한 도시텃밭을 조성가능한지 검토 바람.

 

<주민생활지원과>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 등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이 국내 및 시내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구미시가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기 바람


<사회복지과>

- 어린이집의 실내 공기질과 발암 밀 아토피 유발 물질을 점검하고, 구미경찰서·교통행정과·도로과와 협력하여 어린이집 주변 스쿨존을 늘려나가기 바람.


-
결식아동을 지원하기 위한 급식 단가가 정체되고 있으므로 단가를 증액하여 식사의 질을 개선하기 바람.


-
청소년들이 자신의 여론을 전달할 수 있는 청소년참여위원회를 청소년 지원센터 산하에서 시 산하로 승격하여 위상을 제고하며, 청소년 체험활동을 위한 하나의 훌륭한 장으로 만들어나가기 바람.



<노인종합복지회관>


-
노인종합복지회관의 실외 계단에서 부상을 입은 어르신이 보험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향후 보험 계약 시 실외 사고에 대해서도 보험적용을 하도록 하기 바람.



<구미보건소>


-
‘건강한일터 나비인증’을 1차로 받은 6개 기업 및 8개 사업장은 대기업에 편중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는 반도체노동자 산업재해 논란과 연루되어 있음에도 인증을 받은 기업이 있는데, 해당 기업이 ‘건강한일터’인지 의혹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관련 조례에서도 산업재해 기업의 인증을 제외하거나 취소하도록 되어 있기에 시정을 바람.


- 구미시립노인요양병원 간병사 저임금 및 실직 사태 (별도로 포스팅하겠습니다)

Posted by 김수민
 

11월 26일 구미시의회는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했다. 이날 김수민 의원은 의회운영위원회의 의회사무국 감사, 기획행정위원회의 감사담당관실, 기획예산담당관실, 녹색정책담당관실, 문화예술담당관실, 정보통신담당관실, 홍보담당관실에 관한 감사를 실시했다. 


의회 일반운영비, 업무추진비 투명 공개하고, 의회로 들어오는 불필요한 기념품을 끊어달라

사회단체보조금 심의위원회에 보조대상 단체 회원 들어온 것이 발견

강동문화복지회관, 예술인들과 설계과정에서 협의하고, 교통 대책을 세워 접근성 난점 해결해야

구미시가 박정희리더십 독후감 후원을 극우적 성향 언론인과 함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초등학교 저학년, 중·고등학생에게도 학생블로그 기자단 참여 기회줘야


<의회사무국>

김수민 의원은 구미시의회가 선진적으로 인터넷 생중계를 실시하고 있는데, 의회의 일반운영비와 업무추진비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들이 오해할 소지를 줄이자고 건의했다. 또한 한 행사의 복장을 직접 입고 나와, 평소에도 입기 힘들뿐더러 당시 사정상 많은 의원들이 해당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는데도 문제의 복장을 지급받았다면서, “앞으로 의회사무국에서 이러한 옷이나 기념품은 끊어달라”고 요구했다.


이 복장입니다 -0-




1. 감사담당관실

감사담당관실에서 하는 주민편익사업과 새마을과에서 하는 주민숙원사업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밝히고, 담당 부서를 단일화하고 감사담당관실은 그 이름에 걸맞게 감사에 집중하라고 건의했다.


2. 기획예산담당관실

 1) 사회단체보조금 심의위원회에는 보조받는 단체의 회원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모 단체의 간부가 심의위원이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위원을 위촉할 시 조례내용을 분명히 고지하라고 시정을 촉구했다. 


 2) 각종 위원회에는 일반 시민으로서 위원을 위촉하는 사례가 있다. 그런데 전직 공무원을 위촉하는 사례가 있다. 이를 지양하라고 요구했다. 전문성이 아니라 시민들의 평범한 시선에 할당한 취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
 

 3) 사회단체보조금 지급을 분기별로 나누고 특정단체가 일정 비율 이상 가져갈 수 없게끔 해야 신규단체도 진입가능하다고 밝혔다. 실현되지 않으면 직접 의원발의 조례개정안을 낼 계획이다. 

 
4) 구미시의 전반적 발전기획을 다루고 안에 분과위원회까지 두도록 하는 발전협의회가 비상설로 되어 있고 운영되고 있지 않은데, 조례가 아니라 규정으로 명시되어 있더라도 유명무실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3. 녹색정책담당관실

 
녹색정책담당관실은 학습동아리를 운영하면서 불필요한 일을 버리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조례를 비롯한 불필요한 제도, 규제혁신위원회의 지적사항, 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지적되는 일까지 합쳐 효율적으로 불필요한 시책을 일몰하라고 주문했다.



4. 문화예술담당관실 

 1) 강동문화복지회관은 시가지에서 떨어진 곳에 지어진다. 시민들이 자연스레 야외공연에 합세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실내 공연장도 어떤 성격으로 지을지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협의할 것, 또 이 지역으로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않으므로 교통행정과과 협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2) 영남대학교는 경주 최부자가 기부해 만든 대학을 독재정권이 몰수해서 만든 대학이다. 고로 영남대와 함께 박정희리더십을 연구하는 일은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용천참사돕기는 북한정권에 뇌물을 바치는 정신병적인 행동" "김영삼은 좌파의 숙주" "한나라당 안에 친북좌파가 침투하지 않았나 의심이 든다" 등의 극단적 발언을 했던 조갑제닷컴과 함께 구미시가 영남대 박정희리더십 연구원의 박정희 리더십 독후감을 후원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서 오늘날의 반헌법적인 문제를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 고로 앞으로는 극우적 편향이 농후한 쪽이 아니라, 학술단체와 함께하는 쪽으로 시정하라고 요망했다.


 3) 구미시에 최근 김정술, 김유영, 박상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이 있다. 그러나 '디지털구미문화대전' 홈페이지에서 이들 인물들을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들이 발견되는 즉시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5. 정보통신담당관실

구미시 각 부처 홈페이지로 접속할 때 주소를 쳐서 접속하는 경우는 희귀하다. 그런데 구미시청 홈페이지에서 각 부처로 들어갈 때 접속이 안 되는 부서들이 많다. 이에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6. 홍보담당관실


학생블로그 기자단을 운영하는 데 굳이 초등학교 5, 6학년에 국한해야 하는가. 초등학교 저학년은 힘들고, 중고등학생은 진학관계로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초 중 고 학생들이 두루두루 참여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다. 

Posted by 김수민


신문이 발행되고 난 토요일 오전부터
저에게 격려 메시지가 각지에서 잇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락하신 분들은 대부분 그동안 울분을 견뎌오신 중년 남성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답답함과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공주에 사시는 한 약사 분은 약을 보내주시겠다고까지 하셔서
"마음만 받겠습니다"라며 사양하느라 약간 진땀을 흘렸습니다.

끝내 이분은 제게 약과 편지를 보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구미에 연고가 있으신 어느 분은 구미에 가서 박통에 관해 말할 때마다
"두껑이 열린다"며 아주 속이 시원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단번에 우리네 살림과 역사가 바뀌겠습니까만,
용기와 정의, 진실을 품고 살아가는 댓가로 숱한 힘겨움을 감내하신
시민 분들에게 위안이 되었다면 저로서는 행복할 따름입니다.


11월14일 구미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가 열린다. 2008년 560만원이던 시예산이 ‘서거 30주년’이라는 명목 아래 이듬해 6390만원으로 뛰어올랐다. 올해는 6820만원이다. 나는 9월 제2회 추가경정예산 심사에서, 탄신제 예산과 추모제 예산 700만원, 사진첩 발간 예산 1000만원을 전액삭감하라고 요구했다.

생가 관리는 문화재 보존으로 인정한다 쳐도, 이외의 기념예산도 만만치 않다. 지난 7월의 업무보고에 따르면, 구미시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생가 주변 공원화 사업에 191억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박정희 대통령 홍보관을 설치하는 데 54억원, 영남대의 박정희리더십연구원에 연간 1억원, 제11회 대한민국정수대전에 1억7000만원을 들인다.

예산집행에서 액수보다 중요한 건 가치판단이다. 박정희는 겹겹의 논란과 큼직한 오점들을 남긴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기념사업을 “지지자들끼리 자부담으로 하라”고 주장했다. 물론 구미시의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과거청산은 5·16 쿠데타처럼 벼락같이 찾아오지는 않기에 삭감요망을 관철할 수는 없었다.

회기가 끝난 후 추석을 전후해 친박연합이 ‘발언을 해명하지 못하면 사퇴하라’는 투의 성명을 내더니, 한참이 지나 지역언론 논설실장이 양비론을 펴는 체하며 나를 비판하고 박정희기념사업을 강조하는 논설을 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성은 물론 경제적 실정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기 불로소득은 무려 생산소득의 두배 반에 달했다. 그 중심에는 예금소득의 10배에 달하는 주요 도시 부동산지가의 폭등이 있었다. 횡단으로 지으라는 국내외의 권고를 무시하고 강행된 경부고속국도 사업에서는 인부 77명이 사망하고, 끊임없는 교통사고가 일어났으며, 이후 10년간 도로를 보수하는 비용은 처음의 공사비용에 맞먹었다.

독재정권이 키운 재벌의 날뜀은 통제불능의 상태로 치달아 ‘공적 투자’는 ‘사적 독점’으로 귀결됐다. 실질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향상을 밑돌고, 불평등과 노동탄압이 만연했다. 결국 정권 말기 한국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부마항쟁도 기실 경제적 실패에서 비롯됐다. 윗목에는 온기가 들지 않는데 구들장은 안 고치고 끊임없이 장작만을 투입한 지속 불가능한 성장과 발전 없는 발전. 유신정권은 남한의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북한화’했다.

하지만 반대편의 그 누구도 이러한 비판에 재반박을 하지 못했고, 정체불명의 ‘지역정서’를 끌어들였다. 그들은 내 견해를 ‘사견’으로 규정하면서 23명이나 되는 시의원이 박정희 문제에 관해 모두 자기 뜻대로 생각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의 사고에 따르면, 북한 사람이 “수령님 만세”를 부르고 나치시대 독일의 시민대표자들이 히틀러 독재에 침묵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것이 ‘지역(국민)정서’이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대응하기는커녕 반대의견을 아예 봉쇄하려고 하는 ‘열린 사회의 적’들. 그들은 박정희조차 구현하지 못한 전체주의를 내면화한 채 밖으로는 패권주의를, 안으로는 획일주의를 휘두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박증에 물든 인간일수록 한없이 취약하고 우스워진다. 일개 시의원의 도전에 호들갑을 떨며 입장 변경 또는 침묵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라.

구미 시민 가운데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은 그들의 예상보다는 많다. 박정희에 다소 긍정적이더라도 민간에서 자부담하거나 공과를 같이 전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찬반을 막론하고 대중은 박정희식 정치·경제에서 몸과 마음이 멀어졌고 그것은 최근의 여론조사가 방증한다. 구미라고 예외일까? 더구나 구미 시민의 대다수는 외지 출신이고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이다. 박정희 찬양자들이 과연 언제까지 구미의 재구성을 막을 수 있을까. 얼마가 걸릴지 몰라도 시간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힘’을 편들 것이다. 만물은 변하며, 문제 속에 답이 있다.

김수민 구미시의원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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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의문사로 생을 마감한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사람마다 이름을 부르는 호칭이 따로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꼭 '박정희'라고 불렀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박근혜 씨' 또는 '박근혜'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의 주선으로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62세)를 만났다.

"용서는 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대표가 장준하 선생 유가족에게 사과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박 전 대표가 누구에게 어떤 사과를 했나?"
"어머니에게 했다. 사실 그 전부터 박근혜 씨 주변 사람들이 여러 차례 저에게 접촉을 해 왔다. '박근혜와 차 한잔 마시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어떻게 보면 박근혜도 나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박근혜가 무슨 죄가 있느냐. 독재자의 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을 뿐이지, 장호권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회에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느냐. 단지 장준하라는 딱지가 하나 붙어있기 때문이지' 이런 생각이었다. 박근혜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부모가 있다. 아무리 그(박정희)가 국가의 반역자, 역사의 죄인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는 애비와 딸인데, 불쌍하다."

▲ 故 장준하 선생의 장자, 장호권 씨. 장 선생 생전에 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박근혜가 조용하게 국민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멋있게 정치를 한다면 감싸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박 전 대표를 직접 만나지 않았나?"
제게 평소에 고맙게 해준 정치인 중에 박근혜 씨 손을 들어준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박근혜를 만나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나는 '(만날 용의는 있지만) 이 시점에 만나는 것은 결국 표 때문 아니겠냐. 삼척동자도 다 알텐데 진정성이 없지 않나.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계속 부탁하길래 '나는 안 만난다.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날 누가 누구와 만난 것인가?"
"박근혜와 저의 어머니, 그리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과 이혜훈 의원이 왔다. 저는 그 시간에 여의도에서 <MBC>와 기자회견을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뭐라고 사과했나?"
"과거 자기 아버지 때 일어난 일, 장 선생님이 고생한 것을 사과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정치적인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정치를 해라.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다오.' 이렇게 당부 말씀을 하셨다."
"잘 만났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과거에 얽매어 살면 끝이 없다. 저 자신부터 컨트롤하려고 한다. 그 힘들고 어렵고, 정말 한이 많은 과거를 용서는 해 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아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고 나서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나?"
"(심경이) 복잡하셨는데, 어떻게 느꼈냐고 여쭤봤더니 '얘가 닳고 닳은 정치인은 아닌 것 같더라', '속내는 모르겠지만 요새 정치인들 같지는 않더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고 박근혜도 천주교 신자다. 그런 믿음을 통해 보셨던 모양이더라. 더구나 같은 여자고 인간적으로 (박근혜도) 험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얘가 (박근혜가) 처신을 잘 해야 할 텐데. 잘 했으면 좋겠다'고도 말씀하셨다."
"박근혜 전 대표가 잘 하는 것 같나?"
"글쎄... 잘 해야 되겠죠. 여담이지만 박근혜 씨 옆에 있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본다. 하나는 속물들, MB도 마찬가지지만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아성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하나는 과거 박정희 시대 때 기득권을 갖고 세상을 호령했던 사람들, 다시 한 번 권력을 갖고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둘 다 불건강하다. 건강한 사람은 박근혜 옆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말 한 두 사람, 박정희를 떠나 인간 박근혜를 보고, 인간 박근혜는 미래에 뭘 좀 할 수 있겠다고 보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한 두 사람 정도인 것 같다. 그러니까 박근혜 씨가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도, 이 나라를 옳게 끌고 가기는 힘들지 않겠나?"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것 같나?"
"이 상태로 나가면 가능성이 높다. 우리 야당들, 시시콜콜 할 얘기가 많은데, 한 마디만 하겠다. 정말 획기적으로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정권 교체는 힘들 것 이다."

"장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 전한 사람 멱살을 잡고…"

▲ "그 때 감이 딱 왔다. 돌아가셨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당신 누구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등산 갔다가 보고 온 사람이다. 내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더라."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동안 장호권 씨는 힘들어했다. 아버지 대의 악연과 비극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한다는 것이 그 어려운 세월을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이미 35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1975년 8월 17일을 장호권 씨는 어제 일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돌아가셨을 때 몇 살이었나?"
"스물일곱 살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
"처음에는 사고를 당하셨다고 들었다. 장 선생님이 산행을 다니실 때는 제가 꼭 모시고 다녔었는데, 전날인 토요일날 장 선생님이 '내일 산에 안 가겠다'고 하셨다. 아주 더웠는데, 산행을 안 가고 집에 있겠다고 하셔서 나는 애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갔다. 물놀이 중에 연락이 왔다. 산에 가셔서 다쳤다고. 급히 짐을 싸서 집으로 왔는데 이미 정보기관원들이 집에 와 있더라. 아는 얼굴들도 보이고.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머니는 이미 사고 현장으로 떠나셨더라. 직감적으로 '아,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느꼈다. 그 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이름도 안 밝히고 만나자고 해서 동대문 근처 호텔에 가서 만났다. 등산복입고 있더라. 나를 금방 알아보고서 담배 한 대를 주더라. 내가 '왜 저한테 담배를 주십니까' 했더니 '놀라지 마십시오' 하더라. 그 때 감이 딱 왔다. 돌아가셨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당신 누구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등산 갔다가 보고 온 사람이다. 내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더라."
"'돌아가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났나?"
"'올 게 왔구나', '차라리 감옥소에서 돌아가시지.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집에 돌멩이가 날아오고 그랬다. 유리창이 깨지고. 왜 그랬는지 안다. 한 달 전쯤인 7월 말에 YS, DJ, 함석헌, 유진오 선생과 함께 5자 회담을 해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장 선생이 총대를 메라'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광복절을 맞이해 본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무산이 됐다. (장준하가 모종의 모임을 기획한다는) 그런 말이 새 나간 것이다. 그 직후 청와대 있었던, 장 선생님을 따르던 작은아버지 친구 분이 '몸조심하시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돌아가시기 전에 주변 정리를 하셨다고 하던데, 운명예감 하셨던 걸까?"
"예감을 하셨겠죠. '아 내가 잘못될 수 있겠다'는 것을 느끼시고 주변정리를 하셨던 것 같다. 임시정부 시절의 국기이화여대기증하고 또 어머니를 위해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기셔서 혼배성사를 해 드렸다. 박정희와 극단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그런 정리를 한 것 아니겠나."

장준하와 박정희, 지독한 악연…"박정희가 보낸 대령 귀싸대기를…"

장호권 씨와의 인터뷰는 2시간 넘게 이루어졌다. 그는 어떤 질문을 하든 '얘기하자면 길다. 2박 3일은 해야 한다'면서 한숨부터 쉬었다. 그만큼 한이 깊었다. 그가 이만큼이라도 이야기를 하는데에는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굉장한 악연이었던 것 같다."
"장 선생님과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다. 광복군 할 때도 전혀 몰랐다. 다만 장 선생님이 일본군에서 탈출할 때 '일본군 장교로 나라를 배신하고 광복군을 때려잡는 그런 장교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계셨다."

▲ 박정희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는데, 박정희가 사람을 보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 5가에 있었다. 계급장을 달고 왔는데 대령 정도 된 것 같았다. 뭘 하나 건넸는데 장 선생님이 (대령이) 보는 앞에서 쫙쫙 찢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모자가 휙 돌아갔으니까. ⓒ프레시안(최형락)
"당시 일본 육사로 가는 조선인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다. 일본 정규 육사로 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육사라는 곳은 조선인 신분을 포기해서 일본인이 돼야 가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나라를 받들겠다)이라고 혈서를 썼다. 학교 교장이 '이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고 추천을 해서 들어갔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장 선생님은) 나중에 알았다. 장 선생님이 박정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남로당 사건 때였다. 오제도 검사가 장 선생님에게 이런 의논을 했다. '박정희는 국가를 배신했고, 민족을 배신했고, 자기 동료까지 배신했다. 이런 자는 안 된다.' 육군 특무대에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는데 배신해서 박정희가 살아남았다. (장 선생님이) 그 때 박정희라는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별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자가 있구나'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쿠데타 전이니까.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그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아, 그 사람이 일으켰구나.' 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한국일보>에서 대담을 했는데 '(민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쿠데타 직후에는 장 선생님도 긍정적인 평가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랬다. 당시 사회가 그런 꼴이었다. 그래서 질서를 바로 잡을 필요는 있는데 질서 잡고 나서는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안 돌아가고 정권을 잡으니까 '봐라. 이것이 본색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 때부터 박정희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했다. 당시 재미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사람을 보냈다. <사상계> 사무실종로 5가에 있었다. 계급장을 달고 왔는데 대령 정도 된 것 같았다. 뭘 하나 건넸는데 장 선생님이 (대령이) 보는 앞에서 쫙쫙 찢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모자가 휙 돌아갔으니까. 박정희와는 그렇게 끝났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제스처를 취했지만 전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장 선생님은 광복군 활동을 할 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 정보국, CIA의 전신)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친미주의자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좋아하지만 미국의 정부라거나 정치인들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사고는 아주 싫어한다. 장 선생님도 그러셨다. 장 선생님이 광복군에 있을 때 OSS훈련을 받았다고 친미라고 하는 건 넌센스다."
"이념적으로 좌파는 아니었나."
"절대 아니었다. 장 선생님이 통일 문제라는 주제를 놓고 그 시각으로 민족을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좌파'로 몰아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장 선생님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 민족통일에 왜 좌우가 필요하느냐. 이것은 지상 명령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아 정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고 했다. 박정희가 한 번은 장 선생님을 공산주의로 몰려고 간첩을 하나 연결시키려다 망신을 당했다."
"그게 언제쯤인가?"
"장 선생님 돌아가시기 3년 전 쯤이었다. 그런 음모를 꾸미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포기했다. 장 선생님은 박정희 시대 때 '밀수의 왕초'라는 발언을 해서 대통령 모욕죄 보안사에 끌려간 적도 있다."
"어떤 주장을 했나?"
"삼성 소유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이 하수인이고 박정희가 몸통이다. 그래서 장 선생님이 박정희는 '밀수의 왕초'라고 했다. 국가원수모독죄로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3일 만에 모시고 가라고 해서 갔더니 별자리(장군)들이 장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더라. 그 안에서 무식한 아이들이 장 선생님을 때리려고 하자 장 선생님이 '내가 독립군 대위 출신인데, 일본의 충견이었던 박정희의 졸개한테 맞을 수 있느냐'며 아이들을 되려 때리려 했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위에서 듣고, 한 고위 관계자가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장 선생님을 내보내줬다는 것이다. 모독죄로 들어갔다가 고문도 안 받고 나왔다. 나중에 검찰에 송치돼 구속은 됐지만."

▲ "검시를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김준엽 선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하지 못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 했다. 정황은 분명한데..." ⓒ프레시안(최형락)

"몇 번 구속됐었나?"
"4번 구속됐고 수형 기간은 합치면 한 1년쯤 될 거다. 장 선생님이 협심증이 있었다. 그래서 구속상태로 백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 선생님 죽음과 관련해 조사를 하지 않았나?"
"했다. 조사관에 현직 검사들, 젊은 검사들이 배치됐다. 내가 만나봤는데 검사들이 '조사권밖에 없어서 규명이 어렵다'고 하더라. 박정희 식으로 몇 대 때리면 다 나오겠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시를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김준엽 선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하지 못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 했다. 정황은 분명한데."
"75년에는 사고사가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고, 20년 지나서는 의문사로 성격이 바뀐 것인가?"
"그렇다." 




한반도의 미래 걱정한 장준하…"통일은 지상명령이다"

장호권씨는 아버지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의문사 조사 부분을 얘기할 떄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인물,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라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 것인지….

"장준하 선생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딱 한가지다. 민족주의다. 저도 그 분의 사상을 나름대로 공부해 봤지만, 결국은 한반도가 미래에 어떻게 존재할 것이냐. 그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이었다. 미래 한반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통일은 지상명령이다. 어떤 형태든 통일이 돼야 한다."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장 선생님이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로 갔다. 임시정부에서 만찬을 하는데 장 선생님이 대표 연설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어렵게 임시정부로 왔는데, 각료들이 당을 하나씩 갖고 있더라. 도망 온 학생들을 서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돼 있고,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서 합쳐서 싸울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25살 도망병 (장 선생)이 어른들 앞에서 '이런 꼴 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가 왔다면 차라리 돌아가 일본군에 가서 비행기 조종을 배워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김구 선생님이 장 선생을 비서로 뒀는데 신학대학을 나온 장 선생을 꼭 목사라고 불렀다."

▲ 25살 도망병 (장 선생)이 '이런 꼴 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가 왔다면 차라리 돌아가 일본군에 가서 비행기 조종을 배워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프레시안(최형락)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어떤 사업을 하나?"
"장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민족관, 20대 때 가졌던 국가관을 기리고 있다. 대학생들을 한 번에 100명 씩 매년 1회 뽑아서 10박 11일간 일본군에서 탈출했던 경로를 탐사한다."
"정치인들도 같이 갔던 것 같은데?"
"국회의원도 많이 왔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도 왔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서 감탄만 하고 만다. 당시 일본군 진영청도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탈출을 해 중경 임시정부까지 가는데 거리가 6000리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고. 6000리 길을 걸었다. 탈출 할 때 5명이 탈출했는데, 가면서 계속 모아서 도착한 게 56명이다."
"이번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장 선생님 저서인 '돌배게'를 샀다. 아직 서점에서 책이 팔리더라. 40년 전에 쓴 책인데, 도서관이 아니라 시중에서 팔리더라. 놀랐다."
"그 책을 읽으면 끝까지 보게 된다. 재미 있다. 장 선생님이 쓴 것은 그것 딱 하나밖에 없다. 해방되고 들어와서 이 나라에 소위 광복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변질돼 가는 것. 친일파들이 파티를 열어주면 기생들과 술 먹고 춤추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려 가는 것 등을 한탄하며 썼다."
"돌베개가 무슨 뜻인가?"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광야로 떠나 돌베개를 배고 잔다. 장 선생님이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일본군에 끌려갈 때 모친에게 '내가 끌려가면 일본군에서 탈출할 것이다. 탈출하기 전에 내가 편지를 보낼 텐데, 그 안에 성경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암호를 주고 갔다. 그리고 탈출하기 전에 편지를 모친에게 쓰면서 '내가 광야에서 돌베개를 찾는다'는 구절을 넣었다. 그걸 보고 저희 모친이 '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쓴 돌배게라는 구절을 책에다 썼다."
"돌배게가 많이 나가나?"
"그렇지 않다. 찾는 사람은 찾는데, 책방에 두 세 권뿐이다. 저는 그 이후, 그러니까 5.16 나고 장 선생님 돌아가실 때까지 책을 쓰고 있다. 그 부분은 제가 잘 아니까."
"언제쯤 출간하나?"
"연말쯤으로 계획하고 있다."

"김종필 씨, 죽기 전에 꼭 한번 얼굴을 보고싶다"

"그 동안 어디서 살았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자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가장이 없어졌다. 방향을 잃었다. 생활하는데 십 원 한 장 없고, 쌀 한톨 없었다. 제가 왜 박정희에 대해 더욱 한을 가지고 있느냐. 막말로 (장 선생이) 정적이다. 정적이 없어졌으면 끝내야 되는데, 왜 그 나머지 가족들까지... 장자인 내가 그렇게 심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집안을 (기관원들로) 뺑 둘러쳐서 출입을 못하게 했다. 김옥길 여사(전 이화여대 총장)가 보다 못해 지게꾼에 쌀가마 지게 하고 와서 밤중에 담장으로 던졌다. 쿵 하고 쌀 한가마니가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으로 한 달 먹고 살았다. 김옥길 총장은 그것 때문에 김종필에게 불려갔다는 것 아니냐. 김종필이 '당신 유신에 반대한다며' 그래서 김옥길 여사가(전 이화여대 총장) '쌀 한가마니 던져주는 게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했다고 하더라."

▲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동남아로 도망 나갔다. 뿔뿔이 헤어진 지 36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모두 모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 다 모여야 하지 않겠나…." ⓒ프레시안(최형락)

"김종필 씨를 따로 본 적이 있나?"
"없다. 김종필 씨 죽기 전에 꼭 한 번 얼굴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서 나가 있었나?"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뒤에 제 밑에 남동생이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 쫓겨났다. 여동생 둘이 이화여대를 다녔고, 그 중 한 아이가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입을 줄이려고 졸업하자마자 얘들을 다 시집보냈다. 밑에 남동생은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막내는 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됐다. 막내는 지금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동남아로 도망 나갔다. 뿔뿔이 헤어진 지 36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모두 모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 다 모여야 하지 않겠나…."
"기구하다."
"제가 좀 안정이 되면 장준하 선생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 짐을 좀 덜고 싶다. 누구는 나보고 숙명 아니냐고 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제는 장 선생님의 짐을 내려놓고 내 삶을 좀 살고 싶다. 제가 이 나라에서 야반도주 할 때가 30대다. 50대가 돼 돌아왔다. 나에게는 젊은 시절이 없다."
"한국을 왜 떠났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테러를 당했다. 제가 유엔하고 미국에다 매일 성명서를 보내고 하니까. 4월 19일이었다. 기자들과 술을 먹고 들어가다 보안사 애들을 만나 테러를 당했다. 경희대 의료원에서 6개월을 보냈다. 하비브 전 미국대사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니까 경희의료원이 기관원들에게 뺑 둘러 쳐졌다. 그것을 보고 내가 '장 선생님도 죽였는데 나 같은 것이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날 밤에 도망을 쳤다. 20년 동안 외국에 있었다. 처음 도망갔을 때는 힘들게 나갔다. 엉터리로 서류를 만들어서 도망갔는데, 도움 받은 몇 분이 있다. 도와준 분들이 나중에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라. 말레이시아에 가서 3년 있다가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서 '됐다'하고 들어왔는데 전두환이 들어서서 재야 운동한 학생, 지도자 잡으라고 해서 또 도망갔다. 5년 전에야 들어왔다."

"<사상계> 맥 잇고 있다…언론은 내 삶의 일부분"

"장호권 선생도 언론인인가?"
"그렇다. 언론은 내 삶의 일부분이다. 몸에 뱄다. 조그마하지만 <사상계>를 해 나가고 있다."
"지금도 <사상계>를 하나?"
"인터넷으로 나온다. 인터넷은 잡지라기보다는 뉴스 위주로 간다. 오프라인 종이지가 나온다. 판매는 안하고 정기구독을 한다. 지금 정기구독자가 1200명 정도 된다. 광고도 안하고 (서점에서) 팔지도 않으니까, 입소문으로 인터넷 보고 신청을 하면 보내주는 것이다."
"당시 <사상계>가 몇 부나 나갔나?"
"한창 나갈 때는 일간지가 8만 부 나갈 때 11만 부가 나갔다. 그래서 낙양의 지가를 올린다고 했다. 그것을 박정희가 세무 사찰을 연속 세 번을 해서 뺏어갔다. 장 선생님이 저희 가족을 위해 지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집이 연세대 앞 창천동에 있었다. 7년에 걸쳐 집을 지었는데, 1개월 살고 이 집도 뺏겼다. 그 이후로 저희는 정확히 39번을 이사 다녔다. 아직까지 집이 없다. 무능하다는 소리는 하기 싫고 '(장 선생님) 유지를 받아서 집을 장만하지 않았다'라고 한다.(웃음)"

"본인이 아들임에도 아버지를 '장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어릴 때부터다."
"문성근 씨가 아버지 문익환 목사님을 문 목사님이라고 하는 것을 봤다. 왜 그렇게 부르나?"
"장 선생님이 솔직히 '수신제가(修身齊家)'는 안 하셨다. 그렇다 보니 (나도 어릴 적) 만나 뵐 기회도 별로 없었다. 장 선생님이 6.3세대(64년 한일회담 반대를 위한 6.3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들과 모여 토론을 하는데, 그 학생들에게도 꼭 김 선생, 이 선생 그랬다. 학생들을 굉장히 존중해줬다. 내가 그 분(장준하 선생)에게 배운 것은 누구든 미성년을 벗어나면 존중해야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하대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동료들도 또 저와 친구가 아닌 6.3동지들, 이부영 씨(전 열린우리당 의장) 같은 3~4년 선배들도 저에게 선생님, 선생님 그랬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라고 불러본 경험이 별로 없다. 맞대놓고는 호칭도 못 해봤으니까."
"문성근 씨는 알고 지냈나?"
"잘 안다."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 친구였다. 친구들의 자제들이니까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인가?"
"어릴 때부터 안다. 교류는 별로 없었다. 장 선생님이 두 가지 모임을 했는데, 하나는 한길회였고, 또 하나는 복음동지회였다. 복음동지회는 기독교 관계 사람들이고, 한길회는 장 선생이 훗날 수권을 위해 만든 모임인데, 유창순 씨, 오제도 검사, 이런 사람들이 40~50명 포진해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고 난 뒤에 거기에서 다 뽑아갔다. 문익환 목사님은 복음동지회 멤버였다. 복음동지회는 현실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한 기독교 모임이었고, 친분관계 위주였다."
"세 분이 실제로 친했나?"
"이북에서 같은 학교도 다니고 친했다. 문 목사님하고는 교류를 많이 했다. 당시만 해도 문 목사님은 아주 순박한 시인이고 목사님이었다. 그런 목사님이 장 선생님 돌아가시자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했다."

▲ 고성국 박사와 장호권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 인터뷰는 지난 10월 14일 오후 여의도 카페에서 진행됐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녹취록의 절반쯤을 들어냈다. 더러는 너무 오래된 얘기라서 들어냈고 몇몇 부분은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서 뺐다. 한 두 대목에서는 장호권 씨가 실명으로 얘기하길 망설여서 넘어가기도 했다. 필자의 정리, 편집으로 장준하 선생의 발자취와 그 가족들과 장호권 씨가 견뎌온 인생역정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장호권 씨와 어머님 김희숙 여사의 건강을 기원드린다. 
Posted by 김수민
TAG 박정희
제5대 의회 때 박순이 의원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직접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잘 아는 분은 아닙니다. 다만 전해들은 이야기는 많습니다. "지난 의회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셨다"는 평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의회에서 뵙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열의를 인정받으셨기에 <경북문화신문>의 논설실장으로서 또다른 출발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 올라온 박순이 논설실장의 칼럼은, 그의 '논리정연한 의정활동을 했다'는 전언을 무색케하고 있습니다.
 
<구미시 시의원!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외견상 박정희 기념예산에 관한 구미시의회의 논쟁을 나무란 것 같지만, 박 실장의 견해를 보면 저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K모의원'으로 저는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회내에서의 논쟁은 길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한 언론보도의 잘못된 점을 제가 지적했듯, 이것은 친박연합 '의원'들과 저의 대결이 아니라, 친박연합이라는 하나의 당을 포함한 박정희 지지세력과 저와의 싸움입니다. 원내외를 포괄하고 있는 구도지요.

박순이 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추켜세우면서 제쪽을 비판하고 있지요. 물론 그러면서도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취지는 계속해서 눈에 띕니다.

저는 지금 벌어지는 이런 모양새를 보면서, "제 의견이 존중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존중은 차치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똑똑히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박실장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군요.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발전이 우연한 시간적 일치고 그 누구라도 그 시절에 지도자가 되었다면 다 해냈을 거라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폄하시키려 하고 있다.

지금 논쟁하는 과정에서 저러한 내용이 골자가 되었습니까?
박순이 실장은 상대방 발언의 주요 요지를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 실장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사법사상 최대 암흑 사건으로 지목된 사법살인인 인혁당사건을 비롯
극악무도한 반인권 국가범죄에 대해 고개숙이거나, 최소한 변명이라도 하는, 그런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인을 포함해 수많은 논자들이 지목했던 박정희 정권기의 불가해한 부동산폭등과
배보다 배꼽이 2배 반이나 더 큰, 불로소득이 생산소득의 2.5배에 달했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그 어떤 반론이나 해명도 내놓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박순이 실장님 같은 분들이야말로
"박정희 정권이 없었으면, 인권 탄압이 없었으면, 부동산투기 놔두지 않았으면 경제성장은 안됐다"
라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박실장의 글에 나왔듯, 자신은 마음껏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논리를 펼치고 기념사업에 예산을 지원하자는 논리를 펴면서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거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논쟁 중이냐"는 투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우물에 독을 뿌리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의 발밑을 도려내는 자해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길잃은 채 견해를 펴는 태도는 이미 박실장 논설의 첫머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박에 반박을 통해 나오는 논쟁은 본질은 사라지고 한 시대를 이끌고 간 지도자에 대한 개인의 사견을 마치 정론인양 쏟아내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 찬양이 됐건 비판이 됐건 그것이 "개인의 사견"이라고 치부되어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과연 "정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정론이 무엇입니까?
든든한 '빽'을 두고 하면 정론이 됩니까?

저 문장은 박순이 실장의 논설에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말입니다.  
사견이 됐든 공견이 됐든 간에
자신의 의견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분명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진행된 경과를 보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박정희 옹호 자체보다도
박정희 옹호자들의 태도 자체가 더 문제라는 겁니다.

박정희 옹호자들은 "지역 전체" "지역 정서"라는 금테두리를 두르고
자신의 반대의견에 대해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상대방의 의견에 존중하라"는 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전체주의로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 살아있는 박정희의 옹호자들은 더없는 전체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분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면 우리는 총통체제의 끝에서 이미 파국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번 사건이 제게 남긴 교훈은 명확합니다.
'시의원으로서는 4년 임기 끝까지
시민으로서는 죽을 때까지
문제제기하고 맞서 싸우라.'

저를 타이르거나
혹은 협박하려고 하는 사람은
"구미에서 정치하려면..."
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정치하기 위해 정치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적 없고
그따위로 정치할 생각 없습니다.
Posted by 김수민
TAG 박정희

벗과의 인터뷰 두번째 시간은 10월 16일 토요일 밤이었다. 인터뷰어 겸 정리자는 ID '참서리'로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고 우정을 나눈 친구로, 김수민보다 두살 위이다. '참서리'는 '진상'을 한글로 푼 이름이며 김수민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그가 수도권에 사는 관계로 이번 인터뷰는 채팅으로 이뤄졌다.


참서리: 선거 때도 그렇고 당선된 이후도 그렇고 의정 활동과 관련해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옆에서 도와주는 분이 많이 절실하지 않을까 싶은데, 혼자서 '독고다이' 하느라 많이 힘들지 않았는지?

김수민: 혼자서 하기가 힘에 부치긴 하죠. 제가 의정활동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니까 더 그렇고요. 정당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고. 하지만 시의원은 보좌관 제도가 없기 때문에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두고 열심히 노력해서, 현 제도 하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죠.

-그래도 시정감사 할 때 자료 요청 및 분석할 때나, 일정 챙길 때 여러 모로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나시지 않을까 싶은데 ^^

=힘든 게 있으면 전문위원실에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지방자치 가이드북>이라는 책이 나와서 참고를 많이 하는데요. 전문위원실을 잘 활용하라고 거기도 나오더군요.^^

-전문위원들은 시의회 산하에 있나요 아니면 시청 소속인가?

=시의회 사무국 소속이죠. 입법부 활동을 돕는 행정부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시청에서 일하다 시의회 전문위원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시의회 전문위원 하다가 시청 가는 경우도 있겠네?

=맞아요. 그래서 애매한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의회에서 의원들 돕다 보면 집행부 견제 활동을 돕게 될 수도 있는데, 그 때문에 집행부로 가게 될 때 곤란해질 수도 있죠.

효과적인 조례 발의 문화 필요

-내가 알기로 국회에서는 상임위 별로 전문위원이 있는데 여야 간사들이 자당 추천 전문위원 후보자들을 놓고 양쪽에서 합의해서 선임하고 행정부 공무원이 아니라 외부 전문가를 위촉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시의회에서도 외부 전문가를 전문위원으로 위촉할 수는 없나?

=국회하고 지방의회를 단순 비교하면 안 됩니다. 제도가 많이 다르지요.

-시의회 운영 방식에 대해 무언가 바꿔 보고 싶은 것은 없나?

=시의회 운영방식 변경은 상위법령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조례 제개정 등 지방의회에서의 절차를 통해 바꿀 것인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일단 후자쪽을 말씀드리면 이번 의회 개원 당시 쟁점이 됐던 의장선출방식이 있어요. 따로 후보가 없이 모든 의원이 투표용지에 올라가는 방식이죠. 이른바 교황선출방식이라고 하는데 의회운영위원으로서 조만간 논의에 부칠 예정입니다.
그리고 조례를 효과적으로 발의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구미시의회는 5명 이상이에요. 법적으로 전체 의원의 1/5 이상이라서. 그런데 지방의회에서는 발의선만 넘으면 통과확률이 좀 떨어질 수 있죠. 발의하지 않거나 못한 의원들에게도 결례고. 지난 의회 때는 해당 상임위원들이 발의를 하던데, 이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상임위원도 발의할 수 있어야죠. 그렇다면 전체 의원을 상대로 발의를 논의해야 하는데 이것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없어요. 제도의 문제든 문화의 문제든 개선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시의원의 상과 주민이 생각하는 시의원의 상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는지?
=주민들이 생각하는 시의원의 상도 여러가지입니다. 어떤 주민들이 제게 가져오시는 사안을 보면, 시의원보다는 인권변호사가 필요한 사안도 있어요. 본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시는데, 하소연이라도 하시려고 오시는 거죠. 또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시고 오시기도 하고. 또 단순한 제도권활동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을 기대하고 오시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의원이 동네의 사업, 그것도 주로 건설이나 조경을 맡는 사람이고, 복지라든가 제도개선이라든가 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일부 주민들의 시선과는 괴리가 클 수밖에 없죠."

-지역구 경조사 참석을 원하는 주민들도 많을 것 같은데, 1주일에 보통 경조사는 몇 회 다니는지?

=거의 없습니다. 저한테 그걸 요구하시는 주민들이 없습니다.

-풀뿌리 희망연대 운영위원으로서 시민사회단체와 의정 활동을 위해 주로 어떤 협력을 하는지?

=운영위원이니까 회의에 참석해서 시민운동 과제와 의정활동 방향을 공유합니다. 당정협력은 아니지만, 지역정계의 특성과 제가 처한 상황을 봤을 때는 당정협력과 유사한 측면이 있죠."

박정희기념사업 비판 이후 정치적 타격 없어. 오히려 소신행보에 대한 기대 늘어

-박정희 기념사업 반대 천명 이후 지역 신문 보도에서 부정적인 논조가 많아졌는지? 본인에 대한 부정적 논조가.

=특별히 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박정희 기념사업 반대와 관련해서 협박이나 항의하는 전화나 메일 같은 게 늘어나지는 않았나?

=전화나 메일은 안 받았고요. 어떤 극우적 성향의 시민에게 귀찮은 문자메시지 공세를 받기는 했습니다. 일일이 다 답변했는데 길을 잃고 헤매시더군요.^^저를 능지처참하겠다 생매장하겠다 이런 글이 박사모 카페에 올라왔다는데, 요즘은 그쪽도 키보드 워리어가 됐는지^^ 행동은 없습디다.
박정희 숭배자들의 논리적 미학적 수준이 굉장히 저질이라서 제가 타격을 먹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원래 저하고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저한테 정치적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다음 선거에 나오리라는 자의적인 예상을 가지고 그걸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거야 제가 안나오면 그만이잖아요.^^
제가 박정희기념사업 정부보조를 반대하면서 얻은 것이 한가지가 있다면, "저 사람이 어디에 휘둘리지는 않겠구나" "소신이 최우선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한편에 심어주면서, 그 이후로 민원이 더 많이 들어옵니다. 소신과 용기가 기대된다는 말씀과 함께요. 

-10/26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박정희 기념 사업 반대를 표명한 시의원으로서 10/26 즈음에 무언가 성명이나 논평 등 입장 표명을 할 생각은 없는지?

=꼭 10.26즈음이라서는 아니지만 안 그래도 어디 투고를 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만. 중앙언론이 지방자치에 쏟는 관심이 아직 작아서 실릴지는 모르겠어요.

-박정희 기념 사업 반대 입장 표명 이후 본인을 지지하는 주민들이 나타났는지? 있다면 어떤 분들이고 그들과 무언가 소통하려는 생각은 없나?

=입장 표명 후 저를 지지하신 분들은 2~40대 정도의 고학력 시민들이 많았어요. 지역언론보도나 입소문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듯합니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한줄평이 가능한가?

=제가 같이 정당을 할 만한 전직 대통령은 없습니다.

5분자유발언 목적은 대형마트 좋아하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

-본회의 5분 발언이 대형마트 및 SSM 규제에 대한 건이었는데, 발언에 대한 지역 상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이렇다할 반응을 듣진 못했어요. 어떤 아파트 주민대표자 분께 "인상깊게 봤다"라는 말씀은 들었고요. 지금 시에서 제가 제안한 것의 첫단계인 상설협의체 구성에는 들어갔습니다. 관련 회의에는 언질을 못받아서 가보진 못했습니다.

-대형마트 및 SSM 규제 관련해서 서울처럼 SSM 개업 예정지 앞에서 피케팅이나 시위가 벌어진 적은 없는지?
=예전에 인동지역에서 대형마트 입점저지 운동이 있었죠. 최근에는 따로 직접행동은 없고요. 참고로 지역구내의 구평동에 SSM 2개가 있습니다.

-젊은 주민들 중에는 대형마트나 SSM을 재래시장보다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그들과 특별히 소통하거나 그들의 견해를 분석한 적은 없나?

=여론조사에서 지역주민 85%가 대형마트 입점에 찬성했다고 해요. 견해는 간단합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쇼핑'하시고 싶은 분들이 많은 거지요.
제가 5분발언에 나선 것은 대시민 메시지 전달용으로, 그런 분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분발언 전에 다소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형마트가 있으면 기업유치에도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있더군요. 저는 "들어오더라도 규제를 해야 한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젊은 주민들이 많이 마트 입점을 반기기 때문에, 제가 젊은 의원으로서, 욕을 먹더라도, 그분들을 설득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KEC 노동자들에게는 언제나 죄송

-KEC 파업 사태에서 사측이 강공을 계속 펼치고 있는데, 현재 파업 진행 상황은 어떤가? 조합원 대오가 강력한 단결을 유지하고 있나?

=여느 파업에서 그렇듯 시간이 길어지면 대오를 이탈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잘하고 계시더군요. 남아있는 분은 강력하게 단결하고 있습니다.

-파업에 대한 지역 여론은 어떤가? 
  
=예전에 파업을 대하는 태도와는 조금 다릅니다. 정세상 차이 때문이겠죠. 한나라당 정권하에서의 파업은 욕을 덜먹거나 더 지지를 받습니다. 굉장히 강경투쟁이었던 쌍용차노조투쟁이 그랬잖아요? 다만 대기업 노조라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시도가 있죠. 대기업 노조보다 훨씬 힘든 데는 파업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죠. 참 어리석고 치졸한 여론몰이입니다. 그럼 대기업 노조가 파업 안하고, 사측의 깨기에 그냥 앉아서 대응하면,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원하청 노도자, 영세자영업자, 실업자의 살림살이가 나아집니까? 전혀 아니죠. 그런데 아직 그런 논리가 조금은 먹히고 있습니다.
 
-KEC 파업 연대와 관련 혹시 본인에게 외압이 닥친 적은 없나?

=외압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거쳐 "파업현장에 안갔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들어온 적은 있는데, 지금은 안 통한다는 걸 알 것입니다.

-KEC 노동자들이 파업과 관련 주로 본인에게 요청하는 것은?

=방문해주고 함께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주시죠. 그래서 제가 더 미안하고요. 한동안 뜸했던 적이 있었는데 몇몇 분들이 약간 서운해 하셨습니다. 죄송하지요. 어제는 삼보일배를 같이 했는데 온몸이 쑤시네요. ^^

당면한 최대 사적 과제는 여유 부족과 피로누적

-다른 시의원들은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말썽꾸러기'로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 꾸러기로 생각하실 수 있는데 '다른 꾸러기'일지도. ㅎ
 
-지금 다른 시의원들은 해외 연수를 간다는데 일본과 몽골에서. 일본 정도는 풀뿌리 시민단체와 지방자치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갔다 오면 좋았을 것도 같은데... 일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나? 
 
=연수 프로그램이 그렇게 짜여져 있지가 않죠. 또 그렇게 짜는 것도 힘들 겁니다. 저 한명이 가면 모를까.
 
-1주일에 술 자리는 몇 차례 하는지? 주로 어느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되는지?

=술자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행사장 방문을 하면 조금씩 낮술을 하게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저녁 술자리는 1주 1,2회 정도고 대부분 친구들과 마십니다.

-최근에도 콘솔 게임을 즐기는 게 있나? 새로 게임기 산 것은 없고?

=도난사건 이후에 게임기가 없어서 못하고 있지요.ㅠ

-전체적으로 문화 생활을 즐길 여유가 부족한 것 같은데... 과로에 많이 시달리나?

=여유가 좀 없어요. 영화관에도 한달에 한번 갈까 말까... 다소 피로누적 기미도 있고요. 살이 많이 붙었습니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Posted by 김수민
어제 어느 주민 분들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유지 분들이 많았습니다. 같은 지역의 두 분 시의원님과 함께 참석하여 지역의 여러 현안들-강동문화복지회관, 도로 개설, 이계천 살리기, 3.12공원조성 등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박대통령이나 새마을 관련한 사업을 열성적으로 하시는 분들도 계셨지요. 저는 의정 발언과 논평을 통해 말씀드렸던 이야기들을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발언이 오갔지만 얼굴을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는 그런 풍경은 전혀 아니었고, 차분하게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어제 들었던 이야기들은 늘상 들었던 이야긴데,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분들께 생소하였을 것입니다. 색다른 기회라 생각하시고 숙고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까봐 말씀하신 것에 대한 직답만 해드렸는데, 마지막에 들려주신 이야기에는 답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나온 이야기는 '지역 정서'입니다. 지역 정서를 조금 더 신경써서 활동해달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러면서 "'사견'을 말하면 되겠느냐"는 말씀도 나왔습니다.

어제 못드린 말씀을 여기 적자면 "지역 정서"를 운위하는 것은 반칙입니다. 지역 정서의 기준이 무엇일지? 사람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자기 주변에서 형성된 중론이 지역공동체 전체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독자 분의 소개로 알게 된 멘트가 있습니다. 저의 박대통령 기념사업 정부 보조 반대에 관한 어느 구미시민의 호응입니다.

저도 구미에 거주하고 있는데 사실 박정희 좋아하는 사람 거의 못봤고 다들 관심 없습니다. 예전에 무슨통계를 봤는데 구미가 평균연령이 전국에서 손꼽힐정도로 낮다고 하더군요. 이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구미자체가 취업+대구 출퇴근 목적이 전부라서 연령이 높을수가 없긴합니다. 그래서 박정희를 좋아하지않는다기보단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 드문 구미 토박이 어르신분들은 뭐 당연히 좋아하시고...저런데 돈써도 딱히 누구도 욕하지 않는건 관심이 없기도 하고 구미시가 원체 재정이 좋다고 알려져있기때문에 그냥 넘어가는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재정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제게 지지를 보내시는 이분의 견해를 "지역 정서"로 치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분들의 생각 역시 일부의 생각인 것이며, 어제 어르신들이 제게 말씀하신 "지역 정서"도 사실상 일부의 견해입니다.

 제가 의회에서 무슨 역사토론을 개최하다가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시 예산을 두고 삭감 요망을 밝혔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시의원으로서의 직무수행이며, 사견을 밝힌 것이 아니라 반대 입장에 선, 또는 예산 소요가 꺼림직한 시민들을 대변한 것입니다.

구미시의원은 스물 세명입니다. 스물 세명이서 구미시민들의 다양한 생각을 빠짐없이 대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의견을 '사견'으로 단정지으면서 "지역 정서"에 충실하라는 것은, 제 지지기반과 소신을 배반하면서 주류에 편승하라는 요구에 다름아닙니다. 그럴 것이라면 선거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을 추앙하는 분들이나, 그 반대편의 저 같은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구미가 산업화의 선두 도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 진도를 나가야 합니다. 산업화가 일찍 진행된 지역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만들어내게 되고, 다양한 노선들을 빚게 됩니다. 비근한 사례로는 울산이 있습니다. 구미처럼 박정희 정권기에 발전했던 울산은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고 강력한 노조와 진보정당 소속 공직자들을 갖게 됐습니다.

구미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울산과 달리 박대통령의 그림자가 큰 것은 지역주의라는 요건, 박대통령 시절 형성된 권력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등의 정치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점차 관념적인 수준으로 머무르게 되고,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도시의 정서는 바뀌게 되는 겁니다. 저 위에 제가 예시해놓은 한 시민의 의견도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영남지역이 아직은 호남지역보다 정치적 다양성이 있습니다. 대구경북은 한나라당 독점현상이 강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파열음이 나지 않았습니까? 만일 저 같은 사람이 전라도에서 출마했다면 당선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저는 이것이 산업화의 진척 수준에 따른 호남과 영남의 차이라고 봅니다.

다양성은 산업화와 탈산업화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견해를 억누르거나 억지로 외면하는 자세는 토론과 경쟁, 합의와 조정에 다가서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역동성도 없고 결과적으로 안정성도 없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이 실상 박정희 대통령 일인의 주도가 아니었듯, 박대통령 기념사업 정부지원에 반대하는 시의원의 등장 역시 제가 선도한 것이 아니라 구미 지역의 변화의 한 편린입니다.

보수층이라고 해서 다같은 보수층은 아닙니다. 자신의 입장에 도전해오는 세력들에게 어떤 역량으로 대처 또는 응전할 것인가,에 따라 '합리적 보수'와 '수구반동'이 갈립니다. '지역 정서'를 방패로 삼는 것은 안일한 자세입니다.  

만물은 변합니다.


추신:
어제 박대통령 기념사업과 인동지역 독립운동기념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유지 분들이 제가 대학에서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 공부를 했다는 것을 듣고 큰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현재 진평동 뒷산에 3.12기념공원을 조성하자는 여론이 있는데, 역사적 근거를 풍부히 하고 '스토리 텔링'을 하는 데 제가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어른분들께 그런 작업을 도맡아해달라는 건의를 받았습니다.

매사 이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는 차이대로 인정하면서 대응하고, 공통점은 찾아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김수민

1.

<대구일보>에 박정희 기념사업 정부보조 논란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제가 했던 발언은 워딩이 정확하게 되어 있는데 구도가 잘못 짜여져 있습니다.
제게 온 공개질의서는 친박연합 구미시당협 차원에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기사에는 친박연합 소속 특정 의원이 저와 맞붙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결특위에는 3명의 친박연합 소속 의원들이 계셨습니다만
언성을 높이거나 발언 수위가 강해지는 일 없이 차분히 논의를 하였습니다.
저한테 온 공개질의서도 그 의원님의 주도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친박연합의 당적 차원에서 기초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도는 친박연합 vs. 김수민으로 짜여졌어야 합니다.

2.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남일보>에 박정희대통령 특집기사가 나더군요.
그런데 어떤 결론을 내리든 간에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게 파악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1)
 박정희가 부친에게 반골 기질을 물려받았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박정희를 찬양하는 주요 논객들도 근거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부친은 연이은 과거실패와 과거제 폐지로 낙심이 큰 상황이었고
 고향 동네에서도 외면을 받다가 처남의 권유를 받고 칠곡 약목에서 구미 상모로 이주하게 됩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부친이 무기력한 것에 신물이 나 있었으며
 박정희의 부친도 박정희가 교직을 그만두고 군인이 된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2)
 박정희가 허먼 칸이라는 미래학자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을 전설처럼 써놨더군요. 
 원래 사람이 그런 법입니다. 쓴소리보다는 단소리를 좋아하지요.
 미래학을 두고 떠벌일 일이 아니라 당장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수많은 사람의 조언을 들어야 할 일이 아닐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허먼 칸을 운운하는 것은 웃깁니다.
 허먼 칸은 아시아의 유교자본주의가 서구의 자본주의를 앞지를 날이 온다고 큰소리쳤는데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로 인해 유교자본주의론은 파산을 맞이하게 됩니다.
 진도 좀 나갑시다.


3.
어제 무슨 <구미조은뉴스>인가, 거기 일하신다는 사람이 밤늦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저에게 반론을 주었습니다.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더군요.


박정희 정권의 정치경제적 북한화를 실컷 설명해주었더니

그게 "가정"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을 '가정'이라고 우기는 양반들이
박정희가 없었으면 경제발전 안됐을 거라는 '가정'은 열심히들 하시더군요.

다람쥐 쳇바퀴돌 듯 남의 사생활까지 방해하면서 문자메시지를 보내던 이 양반은 급기야
"인터뷰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분 수준을 보아하니, 악의가 없더라도 워딩이 정확하게 안될 것은 뻔한 일,
저도 녹음기를 들고 임하겠다고 밝히면서,
조선일보나 황우석 광풍이랑 싸웠기 때문에 사실왜곡은 안 통할 거라고 박아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양반 하는 말 "조선일보랑 싸운 게 자랑이냐"는 겁니다.
들으면 몰라요? 자랑이지.

세상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최소한 15년쯤은 그렇게 살아오신 듯)
기자노릇씩이나 하고 살아온, 우물안 개구락지의 서글픈 처지를 물씬 풍기시더군요.

이런 분들께는 제가 조선일보에게 했던 그대로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극우언론, 수구언론, 조폭언론 또는 사이비언론에는
인터뷰, 보도자료 제공 등 일체의 취재협조를 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김수민
TAG 박정희

우리 친박연합 구미시 당협의회에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김수민 구미시의원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냅니다.

 ‘구미는 남한의 평양’ , ‘임기를 걸고’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김수민의원은 구미시 의원직을 자진사퇴하라!

지난 9월 13일, 김수민 구미시 의원은 우리 구미의 자랑이요, 자존심인 박정희대통령을 무시하고 나아가 폄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 친박연합은 어떠한 조치를 불사하고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김수민의원이 저지른 망언에 대해 명백한 사과와 함께 추후 이러한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약 받아, 앞으로는 다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김수민의원의 이 발언을 내일의 음해와 협잡을 차단하기 위해 일벌백계의 수단으로 삼는 바이다.

2010. 9.17.
친박연합 구미시 당협의회   


<박정희정권의 북한화와 경제파탄, 친박연합은 피해대중에게 사죄하라!>



친박연합 구미시 당협의회의 공개질의를 잘 받아보았다. 20년동안 겪어왔던 그대로이다. 내용 없이 되풀이되는 찬양론을 보면서, 또다시 박정희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상기하게 된다. 이런 작태가 '역사적 날치기'이며, 이를 좌시한다면 진짜로 '남한의 평양'이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김일성 유일체제는 동지관계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남한을 북한처럼 만들려 했던 반역사적 프로젝트였다. 유신헌법은 7.4공동성명 이후 공포되었고, 그 일자는 북한이 유일체제 헌법을 공포한 날과 같다. 그래서 양 체제는 서로를 비난하는 성명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3공화국이 민주주의를 권위주의로 후퇴시켰다면, 유신체제는 그 이상의 전체주의를 꿈꾸었다. 유신독재가 지속되었다면, 남한은 속도전식 성장 끝에 주저앉은 북한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유신 말기 총선에서 야당은 여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올렸고, 부산-마산에서는 대규모 항쟁이 일어나, 학생들보다 오히려 기층 민중이 더 분노하여 정권타도를 외쳤다. 김재규가 암살하기 전 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졌다면 박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박정희’ 수하르토처럼 국민의 손으로 축출되었을 것이다. 비록 유신독재의 잉여가 만든 제5공화국이 들어섰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남한은 체제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불로소득 및 부동산 폭등, 졸속건설, 시장통제 실패

박정희 정권기 불로소득은 생산소득의 2.5배에 달했다. 부동산가격은 180배로 폭등했다. 경제가 성장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이는 같은 기간 예금소득의 10배였다. 온갖 난개발과 무능한 밀어붙이기로 세워진 ‘부동산투기공화국’의 국부가 박정희 대통령이다. 장준하 선생의 지휘 하에 정신 맑은 청년들의 손으로 시작된 국토개발사업은 5.16이후 깡패들의 장으로 전락했다. 횡단으로 지으라는 국·내외의 권고를 무시하고 지어진 경부고속국도 사업에서는 인부 77명이 사망하고, 끊임없는 교통사고가 일어났으며, 이후 10년간 도로를 보수하는 비용은 처음의 공사비용에 맞먹었다. 과연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 농토를 등지고, 작업장에서 똥물 세례를 받아가면서 탄압당하고, 술집에서 대통령을 욕을 했다가 잡혀갔다는 말인가? 

박정희 정권 말기 한국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부마항쟁도 기실 경제적 실패에서 나온 사건이다. 박대통령 본인도 재벌의 날뜀을 통제하지 못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두손을 들었다고 한다. 윗목에는 온기가 들지 않는데 구들장은 안 고치고 끊임없이 장작만을 투입한 지속불가능한 성장이 맞이한 결과다. 1960년대 내내 연평균 10퍼센트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던 북한이 주저앉은 것과 흡사하다. 그나마 한국이 쿠바나 라틴아메리카와 달랐던 건 박정희의 영도력 탓이 아니라, 국·내외적 흐름이 수입대체-수출지향의 복선형 발전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박정희향수 퇴조 뚜렷... 또다른 국가개입 정책을 사고하라

박정희신드롬은 왜 일어났는가?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직시해야 할 현상이다. 박정희신드롬은 유신독재에 대한 재평가도 아니고, 그 시절 방식의 경제개발을 재생하라는 요구도 아니다. 입으로는 박정희를 옹호해도 몸으로는 절대 박정희식 정치경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대중이다. 박정희 향수는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사회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환멸, 그리고 강력한 국가개입을 바라는 마음이 어렴풋하게 표현된 현상이다. 오래갈 수 없는 신드롬이다. 며칠 전 한 시사주간지의 여론조사 결과, 전직대통령 가운데 박대통령을 가장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년 전에 비해 20퍼센트나 감소한, 30퍼센트대에 머물렀다.

친박연합에게 묻는다. 작금의 기득권세력들은 기업의 은행소유 제한, 국민의료보험, 그린벨트 등등의 정책을 ‘좌파 정책’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를 도입한 장본인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럼 박정희 대통령은 좌파인가? 친박연합의 정책적 입장은 어떠한가? 이것을, 그리고 오늘날 판치는 시장만능주의를 사고하는 것이 친박연합이 한나라당과 따로 존재하는 이유를 굳건히 할 것이다. 지금 구미시의회에서 친박연합 네 분의 의원들은 나름의 소신활동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본인에게 내용 없는 사과요구를 할 시간에, 그 의원 분들과 잘 상의해 민생정책을 가다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죄하라. 결국 '논리의 힘'이 '힘의 논리'를 이길 것

본인도 요구하겠다. 우리의 경제발전을 위해 피땀 흘려 일했지만 정당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잊혀져간 수많은 ‘김개똥’들에게 절하라. 억울하게 짓밟히고 죽어간 민주애국 영령들 앞에 고개 숙이라. 인혁당사건 희생자들은 판결을 받자마자 사형당하고 시신은 탈취되어 화장되었다. 그들이 우리 이웃 대구 사람들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기 바란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 있다. “문제 안에 답이 있다”고도 한다. 박대통령의 고향에서 기념사업 정부지원을 반대하는 시의원이 나온 것은 필연이다. 역사적 발전의 이치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촛불 하나에 깨진다. ‘임기’가 아니라 양심과 일생을 걸겠다. 민주시민으로서, 또 어려서부터 박정희 문제에 접근했으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역사교사자격증을 소지한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전할 것이다. 이 땅이 정녕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면, ‘논리의 힘’이 ‘힘의 논리’를 이길 것이다.

그처럼 살지 않는 것이 역사적 심판의 첫걸음

지금까지의 박정희 찬양론에 대해 나는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비판하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장난 레코드처럼 극악단순한 논리를 반복한다면, 바로 그러한 행위가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유산'으로 전시될 것이다.

박대통령의 인생을 연구해보니, 교사로서의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또래의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던 시절 “큰 칼”을 차기 위해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내 나이였던 1945년 일본군인으로서 패전을 맞이했다. 그 직후에도 그는 극좌와 극우를 오갔다. 자신은 일제시대 장발을 해놓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장발을 단속했다. 자신이 금지한 일본영화와 술을 안가에서 만끽하기도 했다. 박근혜 의원이 금욕적 국가주의자에 가까운 반면, 박대통령은 권력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이기주의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살지 않는 것, 그것이 나는 박대통령에게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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