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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로

박정희 기념사업 정부보조를 반대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박정희 정권기 16년동안 부동산가격은 180배로 폭등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흔히 "그때는 경제성장기라 그렇다"는 반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는 같은 기간 예금소득 증가율의 10배에 달합니다. 박정희정권기 불로소득은 생산소득의 2.5배였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오늘날 한국경제의 최대 문제이며, 박정희정권기 부동산폭등은 온갖 난개발의 결과이자 섬세하지 못한 경제정책의 상징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IBRD와 야당 등 국내외에서 경부고속국도 건설을 반대한 것은 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모로 종단보다는 횡단도로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리한 건설로 무려 인부 77명이 운명하였고, 중앙분리대 부실로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수도권과 강원도, 영남과 호남을 잇는 효율적인 노선은 개척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똑바로 놓여진 건 정경유착이었습니다. 재벌에게 정치자금을 뜯어내는 행위의 원조는 결코 전두환이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박정희정권 말기는 사상 초유의 경제불황이 왔었고, 이는 야당이 총선에서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부산-마산항쟁 역시 여타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사회경제적 원인에서 촉발된 것입니다. 만일 부마항쟁을 폭력진압하였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가 암살하기 이전에 국민의 손에 의해, 이승만처럼, '인도네시아의 박정희' 수하르토처럼, 권좌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원래 장면 정부에서 나온 것이며, 국토개발사업은 이미 장면 정권 때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해 이 사업을 주도해 나가던 분이 바로 장준하 선생입니다. 그러나 5.16 후 이 사업은 깡패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세력은 그린벨트, 의료보험, 고교평준화 등을 좌파정책이라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이를 도입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을 찬양한다는 분들은 박정희의 약점 뿐 아니라 강점도 잘 모릅니다. 

어제 저에게 한통의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김수민의원! 박대통령님에 대한 발언은 신중을 기해주시길!" 백번천번 신중을 기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박정희 문제에 관해 저를 가르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꾸며진 기억을 유포하는 분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학도로서, 어린시절부터 박정희 문제에 집요하게 접근해온 시민의 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제2회 추가경정예산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 6800여만원, 추모제 700만원, 사진첩 발간 1000만원이 올라왔습니다. 기획행정위원회 예비심사에서 저는 "정부 보조는 납득할 수 없다"라는 짤막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고뇌하였습니다. 주말 내내 편치 않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비로소 자괴감을 덜어냈습니다.

어제 있었던 예결특위 추경예산 심사에서 저는 위 예산의 성격을, 문화재 관리보존인 박대통령 생가 보존과 분리시켜, 전액 삭감할 것을 요망했습니다. 제게 있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문화예술담당관실에서 행사의 특색을 현대화, 예술화시키려고 고심하시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행사의 성격 자체에, 그리고 이것을 정부보조하는 것에 문제제기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2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린시절 기성세대들이 박정희문제를 직시하고 토론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깔아뭉개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강력한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문적으로는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진보성향이 되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정치는 독재였고, 경제는 발전했다'식의 결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희정권기의 경제적 과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1960년대 연평균 10퍼센트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비동맹국가와의 우호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도 탄탄하게 다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쓸 장작을 훔쳐다 미리 지피고, 윗목에는 온기가 들지 않는데 무작정 장작만 투입하는, '영감' 주도가 아닌 '땀' 주도의 지속불가능한 발전이었습니다. 이미 유신 말기에 들어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고, 박대통령 본인도 재벌 등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두손을 든 상태였습니다. 초창기 재벌을 강력히 통제('삼성은행'을 몰수한 장본인이죠. 그래서 뉴라이트 교과서는 5.16군정의 경제정책만큼은 비판합니다)했던 박대통령은 오히려 재벌이 날뛰는 경제를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경제성장을 일군다는 편견은, 이미 북녘의 전체주의 체제가 겪고 있는 경제란으로 충분히 반증되었기도 하지만, 박정희시대 스스로가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상 대통령선거에서 한번밖에 이긴 적이 없습니다. 1967년 치러진 제6대 대선입니다. 그때 경제가 가장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죠. 그러나 정작 카리스마적 리더쉽을 공고화하며, 권위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를 구상했던 유신독재 들어 경제는 더욱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독재자가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공식이 맞다면, 유신독재 때의 남한이나 유일체제 구축 이후의 북한은 세계 최선진국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제 말씀드렸듯 박정희시대에 명암이 있는 게 아니라, 박정희경제정책에 명암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 세명 중 한명의 시의원입니다. 산술적으로는 4.35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합니다. 구미시민 가운데 박정희대통령에 비판적인 시민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양심 뿐 아니라 이러한 목소리를 대변할 의무를 지닙니다.

제가 주장한다고 해서 관철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일반 여론이 결국 정책을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역 정서'로 포장된 반대편의 견해에 주눅들지 말고,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 이전의 구미는 '좌파 도시'였습니다. 구미에서 이름을 날린 독립운동가들을 보면 압니다. 도시의 여론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양한 여론이 있음을 표출하는 동시에, 앞으로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우리 구미를 만들고자 합니다.
 
남한은 북한이 아니며
구미는 평양이 아닙니다.

남한이 북한처럼 되지 않은 것은 박정희가 김일성보다 훌륭해서가 아니라, 박정희가 추구한 '남한의 북한화'를 민주화 및 다원화가 막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념하고, 정부에서 보조할 값어치가 있는 역사는, 바로 이러한 전체적 차원에서의 현대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은 그분을 추앙하는 분들이 민간 차원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 해당하므로 굳이 막지 않겠습니다. 또 박대통령을 기리는 분 가운데는 자금력이 풍부한 분들이 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보조는 반대합니다.

근대화, 현대화는 다양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답은 문제 안에서 나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 정부 보조를 반대하는 시의원이 나온 것은 운명입니다. 저는 박대통령에게 이기고 싶습니다. 박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입니다. 청년 박정희는 인생의 고비에서 주저앉을 때마다 권력의 획득으로써 이를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 자신 그대로, 뜻이 맞는 시민들과의 수평적 연대를 이뤄 박정희대통령을 넘어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