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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 자라난 길

수몰된 고향과도 같은...

경북도의원 구미 제1선거구에 출마한 백천봉 예비후보.
경북 교육의원에 출마한 박수봉 예비후보.
이 두분의 공통점은?

제가 어렸을 적 부활되어 치러진 지방선거에 나오셨던 분들입니다. 19년 전이지만 그때 기억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후보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그분들과 저 사이에는 입장차가 꽤 크게 존재할 겁니다. 그래서 더 공교롭습니다. 

백천봉 도의원은 당시에 무소속으로 나와 3위로 낙선을 하셨습니다.
1위는 구미의 사업가로 알려진,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민자당 후보였고
2위는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하셨던 민중당 후보입니다. 당시 표가 꽤 나왔습니다.
지금은 다른 생업에 종사한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도 1989년이었을 겁니다. 금오산 가족나들이. 거북이 조형물에 올라탔다가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장면입니다.

"저런 데 올라가면 안된다. 도덕 시간에 그런 것도 안 배우나?"
"냠냠, 도덕 아이고 바른생활인데요...쩝쩝.."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 시절의 저는 공부는 잘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즐겨서 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축구나 글짓기 같은 것에 흥미가 많았고 
5, 6학년 때는 배구부 활동을 합니다. 

반장을 자주 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성격이 너무 순한 편이라 리더십 같은 건 좀 달렸던 것 같네요.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장사도 해보는 맹랑한 아이였습니다. 
커다란 연습장 종이를 펴놓고 '마을신문'이란답시고 괴발괴발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게 지금 돌아보면 '풀뿌리 시민운동'의 첫 출발이라고나 할까요? (농담입니다.^^)
 
제가 당시 살던 동네는 광평동입니다. 얼마 전 곰곰이 돌아보니까 우리 학교는 절대적으로 서민층 비율이
높았습니다. 그즈음 형곡동이 개발되면서 중산층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많이 빠져 나갔지요.
그때 광평동은 좀 특이한 동네였습니다. 공단입구에 있는 수출탑을 품고 있으면서도 논이 많았고요.

그 시절을 돌아보다가 좀 아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친구들끼리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 다툼은 양쪽 다 형편이 빠듯한 아이들의 몫이었습니다.
"지네 집은 스레뜨 지붕인 주제에."
"하이고 너거 집은 허름한 식당하잖아."
이게 국민학교 3학년생의 대화라면, 믿어지십니까?
저는 마음 한켠에 '왜 비슷비슷한 애들끼리 싸우지?'하는 의문이 잠시나마 있었습니다.

지금 광평동은 너무 달라졌죠. 대형마트가 속속 들어섰고요.

제가 살던 마을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네잎클로버가 무성한 자리도 사라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발을 좋아한다지만 이런 부분은 안타깝습니다. 미래라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인데.

초등학교 교가에는 '2000의 용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제가 다닐 적만 해도 1500명쯤 되었었죠.

지금은 200명이랍니다.

작은 학교는 작은 학교로서의 강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을 모교가 살려 나가길 바라고요.

제가 7년간 살았던 그 동네는 없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길이 남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