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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 자라난 길

문학특기자가 된 ROCK 매니아

어린이날입니다. 20여년 전 어린이날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백일장이 있었는데
처음 글짓기대회에 출전을 했습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걸 괴발괴발 써내려갔는데
그만 장원을 타버렸습니다. 본격적인 칼럼니스트 활동은 스무살무렵부터 했지만,
과장을 섞어서, 제 글쓰기 인생은 어느덧 20년이 되었습니다.

10년전 저는 문학특기자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졸업한 대학을 보신 분들은 제가 고교 시절 공부를 꽤 잘했으리라고 생각하시지만,
당시 저는 성적 반영이 거의 없는 오로지 문학특기 하나로 인정받다시피하면서 합격했습니다.
 
고교 시절 저는 문학보다는 음악에 훨씬 관심이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락음악,
그중에서도 70년대~90년대 초반의 하드록 계열 음악에 미쳐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제 또래들은 본 조비, 메탈리카, 엑스 재팬, 너바나 등 국내에서 대중적인 음악을 들었는데
저는 딥 퍼플, 화이트 스네이크, 디오, 펄 잼 등 더 매니아 취향이면서 복고적인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밴드도 학교 공식밴드가 아니라 따로 만들게 되었는데 
과정이 무난할 리 없었습니다. 멤버는 다섯 모아놓긴 했는데 몇명 빼고는 연주를 못하는 수준이고...
배울 시간도 없고 연습할 공간도 없고... "U2도 스쿨밴드 시작할 땐 악기 못했대"라고 위안하고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결국 밴드는 깨지게 됩니다.   

그후 저는 혼자서 연습을 하고 음악도 혼자듣다시피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핫뮤직>이라는 잡지를
열독합니다. 그리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몰래 음악평론을 쓰게 됩니다.

고교 1, 2학년 시절 저는 중학교 때와는 달리, 음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습니다.
그래서 글짓기 대회에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평론 연습을 하던 그때 글쓰기 실력이
오히려 크게 늘어나게 됩니다.

지금도 구미에서 교단에 서시고 계시는 두 분 선생님이 계십니다. 한분은 제가 고3때 담임이셨고
다른 한분은 작문 담당이었습니다. 두분 다 국어교과 선생님이십니다.
고3 첫 작문시간에 제가 졸지에 발굴이 되다시피했고, 뒤늦게 저는 국어, 논술, 문학경시에
뛰어들어 담임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몇차례 수상도 하고 낙방도 하다가 2000년 7월 어느 학교에서 열린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습니다.

저는 상을 받던 순간에도 바로 그 학교에 입학할 것이라는 예상을 못했습니다.
그런 예상은 저 말고도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꾸 겸손인 줄 아는데, 저는 고교 시절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서를 내고 며칠 기다렸더니 거짓말처럼 떡 붙어버린 겁니다. 
그즈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앞날에 대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수상과 합격 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얼얼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저는 수능성적 조건 없이 문학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탓인지 저는 같은 대학을 다닌 학생들과는 판이한 성장과정과 사고방식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녔을 무렵은 한창 대학생 보수화, 탈정치화의 시대였습니다. 
저보다 너댓살 많은 형들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내놓은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록음악을 좋아했고, 또 어려서부터 진보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문학특기자로 대학에 입학한 것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스펙'을 쌓아서 대기업에 들어가 높은 연봉에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것으로부터 관심을 떼게 됐습니다.  
또 경제체제의 변화로 인해 어차피 '출세'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제 나름의 예견도 있었습니다.

문필의 힘으로 세상을 개선하고 내 자신을 구원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특별한 각오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손발의 구조상 인간은 10이라는 단위를 중하게 여깁니다.
저로서는 20년전 어린이날의 기억, 10년전의 문학특기자 합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성공을 거둬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년전, 10년전 어렸을 적에도 가지고 있던 가치,
그리고 그동안 새로 맞이했던 교훈들을 모두 목마 태우고
성패를 떠나 꿋꿋한 길을 가야겠습니다.

20년전 오늘, 그리고 10년전에도 어떤 결과를 염두하고 제가 도전했던 것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