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서른살이 된답시고 '좋은 정책 계란한판'을 짜고 있었다. 1번은 '혁신교육'이었다. 혁신학교에 관한 도서를 주문해 손에 받아든 바로 그때 아이쿱 구미생협에서 공지문자를 보냈다. 23일 오후 2시 옥계동 생협사무실에서 '혁신학교 간담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의 주요정책으로 소개되었던 혁신학교의 골자는 내가 그리는 학교 그대로다. 학생인권 보장, 민주적 학교운영, 학급당 적은 학생수, 교원의 자율적인 맞춤형 교육, 협동식 토론학습, 지역사회와의 협력, 줄세우지 않는 절대평가... 마침 운때가 맞아 떨어진 탓일까. 혁신학교를 준비하는 교사들이 있었다.
혁신학교에 관심을 가진 학모와 학부, 그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로 생협의 작은 사무실이 꽉 찼다. 그들 중 상당수가 대안학교 입학을 고민했다고 한다. 나는 어느날 한 후배에게 "자녀를 낳으면 대안학교에 보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글쎄. 자녀가 간절히 원한다면 가도록 하겠지만, 대안학교보다는 공교육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자녀가 특별히 '일반적인 상황'을 피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안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개성적이다. 그런데 그 학생들끼리 견줘보면 비슷비슷하다. 현실적으로 대안학교는 공교육에 적응못한 이른바 '문제아'들이 가기도 하지만, 고학력 중산층에 속하며 혁신적 성향을 가진 학부모들의 자녀들이 많이 간다. 끼리끼리 어울리다가 사람의 사회적인 체질이 약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나로서는 아이를 특별하고 예외적인 영역에 들어가도록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싶지 않았다.
선물로 주어지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억압과 해방의 과정을 거친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다. 유럽의 민주주의와 일본의 민주주의를 대조하면 금세 알 수 있다. 정말로 피해가야 한다면 몰라도, (내게 자녀가 있다면) 어지간하면 자녀가 친구들과 함께 불합리한 현실을 겪고 이것을 손수 뚫고 나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도움을 주고 일정한 보호권을 행사할 어른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다.
또한 그저 어른이나 부모로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운동가, 정치인으로서 공교육 혁신에 필요한 에너지를 과도하게 대안학교에 쏟는 것을 경계한다. 답은 공교육 혁신, 혁신적 공교육이다. 대안학교를 보낼 엄두도 못내는, 아니 대안학교가 뭔지도 모르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놔두고 대안교육을 추구한다는 것은 또다른 특권 추구에 다름 아니다.
혁신학교는 또다른 별천지가 아니다. 그리 될 수는 있겠지만 그리 되면 안 된다. 혁신학교는 희망을 전염시키는 시범학교다. 나는 간담회 자리에서 어렴풋하게나마 '혁신학교 벨트'와 '교육혁신특구'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지 않아도 내 지역구는 이미 교육복지투자 우선지역이다.
또 나는 혁신학교가 취지를 오해한 기성세력에 의해 변질될 가능성을 미리 제기하였다. 소위 명품교육과 명문학교 육성에 정신팔린 세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이 혁신학교의 실내용에 반발하여 프로젝트를 무산시킬 수 있다. 정치인은 시민사회와 운동진영의 요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임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앞장서서 헤치고 싸워나가야 한다. 혁신학교를 망가뜨리거나 거부하는 이들에 맞서 싸울 것이다.
현재 자녀가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등학교 학부모들은 이것저것 가릴 만한 입장이 못 된다. 그러나 좀 더 어린 학생의 부모들은 비판정신과 여유로움을 함께 품으며 정말로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선거기간 만난 인의주공의 어머님들은 "아이가 숙제와 학원으로 잠을 못 자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함께 걱정했지만 나는 희망을 가졌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 같지 않았다. 황상동에 사는 한 어머님은 명문학교 육성론에 대해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명문학교에 가지 못한 학생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어제 간담회에 온 조합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절박함과 문제의식을, 또 여러가지 미래를 두고 깊이 고민한 사람다운 치열함을 느꼈다. 서울대 입학생 수로 일희일비하고, '자율형 사립고'를 마치 구원군으로 생각하는 지역사회 일각의 작태에 분노와 갑갑함을 느끼던 차였다.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그러나 그들이 제 아무리 교육기득권을 장악해도 그들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영역을 만들어나간다면 뒤쳐지는 구미교육도 바뀔 것이다.
경북도의회는 예결특위도 아닌 교육위원회 주도로 무상급식 지원 예산 40억을 전액삭감했다. 구미시의회에서도 무상급식 조례안이 보류된 상황이다. 다른 원대한 꿈도 아닌 의무교육도 이렇게 지리멸렬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나는 혁신학교를 그리는 분들과 함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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