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나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거꾸로가 아니라.
사실 저는 안티조선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운동 경력을 정당에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선거에 즈음해서도 나는 왜 어느어느당에 입당했었으며 왜 그 당에서 탈당했는지를 공보물에 죄다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쓰지를 못했습니다. 정당운동을 빼니 약력이 확 줄더군요. 제가 쓰지 못한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당원들이 저를 지지해주고 있는데 그 당에 대한 불만이 담긴 탈당 사유를 공보물에 적는 게 인간적으로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고요. 둘째는 이 선거가 기초의원 선거라서 중앙정치 참여경력을 줄줄이 읊어대는 게 좀 안 어울리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쓸 걸 그랬나 싶습니다. 안 써서 손해 많이 봤습니다. 선거 내내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걸고 임했지만, 제가 '무소속'이라는 이유로 제 성향을 가벼이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2006년 가을 저는 한창 정당활동 중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연세대분회 문화부장이었고, 한 학생정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날벼락을 두개 맞게 됩니다. 하나는 북한의 핵실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심회 사건이었습니다. 진보주의자의 강령은 반전반핵입니다.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북한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사람은 그냥 민족주의 정당해야죠. 당 주류는 북핵 '비판'을 부결시키고 '유감'으로 낮췄습니다. 일심회사건의 전말은 간단합니다. 당원 한사람이 북한에 당의 정보를 담은 보고서를 써서 넘긴 겁니다. 저는 이 행위가 사회안전을 어지럽힌다고 보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도 없어져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명백한 해당행위입니다. 국정원이 아니라 당기위에서 징계할 일입니다.
정파인지 종파인지도 모를 패거리를 만들어 히히덕거리면서 떼지어 다니고, 대중앞에서 하는 말하고 끼리끼리 술먹고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리 없었습니다. 당시 대학가는 탈-정치 및 반-진보주의적 세설이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수구세력들에게 한치의 틈도 내주지 않겠다며 역공하는 게 평소 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뒤통수를 때리는 부끄러운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당활동을 중지하고 심각하게 방황하였습니다. 그때 떠났어야 했는데 떠나지 못한 건 이듬해 있었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당혁신의 드라마를 만들자는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경선과 대선을 거치고 볼 거 못 볼 거 다보고 나니, 사람들이 이젠 갈라서자고 하더군요. 저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남(타 정파) 때문에 내 얼굴에 먹칠하는 것도 싫고, 앞으로는 남 탓(정파투쟁)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느새 '선도탈당파'가 돼 있더군요. 저 같이 당내 민족주의, 통일지상주의를 비판했던 분들 중에는 저처럼 행동하지 않는 분도 많았습니다. 비상대책위를 믿고 혁신해보자는 분도 계셨고, 혁신안이 좌절되었음에도 끝내는 당을 떠나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비대위가 전권을 쥐고 당을 혁신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례대표 전략공천권까지 쥔다더군요. 이게 웬 민주집중제? 또 하나의 패권주의였습니다. 대중정당이 아닌 원내정당, 명망가정당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당원총투표'를 요구했습니다. 낄 틈도 없더군요.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 비좁은 데서 권력투쟁하지 말고, 신나게 어깨 걸고 들판에서 싸우다 죽자." 2008년 1월 하순 저는 탈당합니다.
2월 3일 당대회에서 혁신안은 부결되고 분당사태는 조금 더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그 결과로 진보신당이 탄생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자진해산하고 진보신당에 가입합니다. 제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었고 창당부터 참여했으니 노동당 시절의 비생산적 신세는 면하겠지 싶었죠. 그런데 이런, 하기야 20대 내내 그렇게 살았지만, 잘되는 게 없더군요. 초장부터 암초를 만났습니다. 2008년 총선 고양 덕양갑에서 민주당 후보가 진보신당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하고, 진보신당 후보는 이걸 덥썩 물었습니다. 제 입장은 이랬습니다: "단일화? 할 수 있다. 허나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기든 지든 떳떳한, 가치와 정책에 기초한 단일화를 하자. 한미FTA반대, 비정규직 문제, 어따 팔아먹었냐? 민주당에게 이걸 요구해라."
저는 덜떨어진 극좌파쯤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탈당해서 화염병이나 던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 이들 중에는 예전에 저를 개량주의자라고 폄하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저를 급진주의자로 만들어주더군요. 그 말들엔 부끄러움이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3등 이하일 때는 독자노선 펴고 2등일 때는 단일화할 따름이죠. 이 단일화는 여론조사 문항 따위를 둘러싼 견해차에 막혀 좌초됩니다. 논쟁도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끝난 논쟁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2009년 4월 재보선이 울산북구에서 열립니다. 진보정당의 강세 지역이죠. 진보신당에선 원래 국회의원이었던 조승수 씨가 나섰습니다. 한편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후보는 참담했습니다. 분당의 이유가 된 문제들을 극명하게 띠고 있는... 게다가 공직자 시절 자신의 소유 지역으로 소방도로를 지나가게 만들어 스캔들을 일으킨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몇달 전 출간된 이갑용 씨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도 나옵니다. 노동운동을 망친 건 물론이고 심지어 통일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얼마 전에 민주노동당의 한 당원에게 그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 여쭸습니다. 답은 단호했습니다. "패권주의 깡패 두목이다."
그런 인물, 그리고 그런 이를 후보로 공천한 쪽과 아무 조건 없이 단일화를 하겠다면, "정녕 분당은 왜 한 것이냐?" 항의했습니다. 그때도 또다시 여론조사 문항 따위로 공방이 벌어지더군요. 그리고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작정 단일화하자는 당원들이 협상이 잘 안되자 뒤늦게 상대방을 비방하고 나선 겁니다. 묻고 싶었습니다. "그럼, 왜 그런 사람이랑 왜 단일화하자고 했는데요?" 앞뒤가 안 맞는 행태에 인간적으로도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밖에도, 제가 창당 멤버인데도 당이 도대체 뭘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촛불집회 때 진보신당 당원수가 늘었습니다. 그러나 양적 증가에 고무되었을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서울시당 당원교육준비팀원이던 저는 당직과 함께 당적도 던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단일후보가 된 진보신당 후보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촛불 때부터 도취 분위기였는데 원내진입까지 하니 당원들로서는 기뻤겠지요. 그러나 한달 뒤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그 무드도 끝났습니다. 당에 남은 친구에게 들으니 "국민참여당으로 가겠다며 탈당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럴 만했습니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입증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국민참여당과도 차별화되지 못한 대중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것들-비정규 노동자, 생태적 가치 등을 대변하겠다고 만들었는데, 해놓고 나니 그냥 그저그런 수도권 지식인당이 되어 눌러 앉을 태세였습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했지만 진보신당에 들어가지 않은 분들 중에는 "진보신당이 제대로 길을 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근거를 드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제가 탈당한 이후 한동안은 저랑 알고 지내던 활동가 누구도 제 문제제기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제기가 가치 없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고, 제가 보잘것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단 한사람만이 달랐습니다. 진보신당 마산당협위원장이 저에게 사과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한테 사과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저의 뜻에 공감해주셨던 분입니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사과하고, 반성했던 사람이 또 반성하는... 그런 풍경이 늘 벌어집니다.
탈당할 때 어떤 분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세요"라고 따뜻하게 한마디 해주더군요. 그러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틀어져 포기하고 나온 상황에서, 미움만은 가질 필요는 없겠죠. 저는 저대로의 길을 가야 하고... 정당운동을 관두고 저는 라디오PD가 되어 언론노조에서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러다 취업준비를 고향에서 하자고 결심했고, 또 그러다 풀뿌리운동에 관심이 생겼고, 풀뿌리운동과 노동운동의 접목에 마음이 이끌렸고, 다분히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출마 결심을 내립니다. 제가 출마를 결심할 적에 구미는 다 2인선거구였고, 당선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대중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 다하고, 내 방식대로 임해본다. 그럼 후회는 없을 것이다."
선거 때 "나를 시민 후보라고 하지만, 또한 노동자 후보이기도 하다"라고 항상 마음먹었습니다. 민주노총의 공식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운동하던 놈이 갑자기 나타나 구미 운동가들에게 "지지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전국적 선거방침을 보니 억울한 점이 하나는 있습니다. 한미FTA를 밀어붙였던 분들도 반MB라는 방침 하에 민주노총 지지 후보가 됐는데, 정작 한미FTA에 반대하며 길거리를 쏘다녔던 저는 지지 후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조합원이고, 마음에 안 들어도 탈당하듯 민주노총을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노동계급 대중조직은 정당하고 다르니까요. 저와 노선이 비슷한 사람 중에는 '제3노총'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저는 예전부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당은 깨도 노총은 깨지 말자"는 지론이었습니다. 당은 수만명으로도 일단 충분하지만 노총은 수십만은 되어야 내셔널 센터 역할도 하고 그렇습니다. 또 만들려면 엄청 힘듭니다. 욕할 게 있어도 안에서 욕할 겁니다.
말을 옮겨 적듯 써서 글을 쓰는 덴 별로 시간이 안 걸렸지만, 서울에서의 정당활동을 돌아보니 긴 생각에 사로잡혔네요. 오랫만에 밤을 새었습니다.
진보정당운동은 어떡해야 할까요? 지방선거 거치면서 진보정당들도 시끄러워졌습니다. 저한테 "이 꼴 보느니 잘 나갔다"라고 하시는 분도 꽤 있었고, "너 같은 애가 이탈하는 바람에 더 어렵게 됐다"는 분도 딱 한명 있었습니다. 저는 진보정당운동 포기 안했습니다. 포기하시려는 분들이 오히려 아직 남아 계시더라고요. 언젠가는 정리가 되겠죠. 2008년 초 추위 속에서 "안에서 말라죽느니 밖에서 얼어죽겠다"며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결의하던, 그때와 같은 상황이 올까요? 그렇다면 저는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혹한 속으로 뛰어겠습니다. 지금이 여름이라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연합은 유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과 가치가 기준이 돼야 한다." 계속해서 제가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도 요즘은 제 말에 끄덕여주는 분들이 좀 보여서 위안은 됩니다. "정치참여하지 말고 화염병이나 던지라"고 야유 들을 때보단 훨씬 낫지요. 그런 야유는 앞으로 수구보수 쪽에게 실컷 들을 말인데, 진보진영 안에서 듣고 싶진 않네요.
* (제 성향 잘 모르시고 먹히지도 않을 요구를 하시는 수구보수적인 분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이 아니라 앞으론 사람 잘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소수파로 지냈는데, 그쪽 말이 저한테 먹히겠습니까..? ^-^)
'시민으로 자라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4년이면 충분하다 (0) | 2010.11.01 |
---|---|
아직 듣는 질문에 대한 길다란 답 (0) | 2010.08.12 |
나이 들수록 진보하는 사람 (0) | 2010.05.29 |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교 한국학), 김수민 후보를 응원하다 (0) | 2010.05.27 |
노회찬, 임종인 전 의원과의 인연 (1) | 2010.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