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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청소년

'청소년이 진정으로 기대하는 청소년 정책'

지난 여름, 구미YMCA가 비영리단체 지원을 받아 열었던 '교육 및 청소년정책 포럼'이
드디어 종합토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고, 청소년들과 함께 토론을 진행했던 저는
마지막 시간에도 발제자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저 이외에도 구미교육청 관계자, 구미시 청소년담당업무 공무원, 상모고등학교 교사 분께서 참석하셔서
청소년의 권리 존중을 위한 지역사회와 학교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종합토론을 위한 청소년들의 분임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열정적인 분임토론에 돌입한 청소년들


청소년들이 말하는 현실은 제가 청소년이던 시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진로교육이 부족하다.
청소년들의 문화생활이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저는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하며 참여하려는 청소년들과
이에 성심껏 부응하려는 어른들의 모습이
변화와 개선의 단초일 것이라고 감히 장담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유쾌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일상의 대부분을 유쾌하지 못하게 보내기 쉬운 나날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결정하는 스스로의 일에 대해서 지나친 간섭은,
그것이 아무리 선의를 띠고 있더라도, 폭력과 억압이 됩니다.

저는 "지역사회 어른들의 역할은 어쩌면 좀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고,
청소년들에게는 "존중해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치적으로 청소년들의 역량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습니다. 

저는 지난 1년여간 청소년의 권리를 존중하며 그들의 시정 참여를 보장하는
조례안을 청소년들과 함께 준비해 왔습니다.
그 결실이 내년 봄쯤에 꼭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청소년들의 더욱 열띤 참여를 응원합니다.

청진기를 들고 마음이 뛰는 소리를 들어봅시다^^



이날 제가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지역사회의 역할


  이따금 버스정류장의 향나무 뒤에 어설프게 숨어 옥수수밭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들을 목격한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담배를 피워야 할 이유가 있었을 테고, ‘왜 담배를 피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된 적이 없을 것이다. 또 그들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놓친 사람들도 담배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들의 손에 쥐어줄 준비를 하지 못했다.

  청소년은 사회의 한 주역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은 주체로 승인받거나 참여를 보장받지 못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대상화’된다. 이를테면 청소년보호법은 아주 자연스럽게 청소년 관련 법률 가운데 가장 큰 존재감을 갖게 된다. 법률 뿐 아니라 구미시의 청소년 관련 조례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청소년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청소년은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참여주체라기보다는 지도받고 보호받으며 육성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조례의 이러한 한계는 법률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법률을 보완하거나 법률의 씨앗이 될 만한 조례가 전무한 건 지역사회의 책임감이 박약하다는 한 증거다.

  솔직하게 말하자. 청소년 관련 법령을 분석하고 그것의 단점을 말하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다. 왜냐면 이 사회는 ‘청소년-인지적 관점’ 자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의 강력한 배경은 우선 그들이 상당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아침부터 마치 돈을 벌기 위해 어디론가 출근하는 노동자처럼 서두른다. 하굣길의 동선은 최소로 제한돼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배회’, ‘방황’, ‘이탈’로 규정당하며, 탈학교 청소년은 당연히 눈 밖에 나는 동시에 감시 대상이 된다. 학교나 가정 바깥에서의 생활은 곧 감시와 통제를 벗어난 불안한 일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청소년에 대한 배려가 희박하고 부족한 원인은 그들을 ‘우리의 미래’로서 바라보는 태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청소년을 ‘미래세대’로 보는 관점은 한국사회에서 지나치게 강하다. 청소년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할 한 인간이 아니라, 장래에 국가와 사회를 짊어져야 할 일꾼, ‘인적 자원(자본)’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그러니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개인의 오늘을 희생하라는 주문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청소년들은 가치관을 가다듬기도 전에 공동체의 기성 원리를 주입받으며, 훌륭히 적응하거나, 도태되고 탈락한다.

  “짬을 먹으면 부대의 악습을 일소하겠다”고 다짐하는 새카만 신병도 결국엔 악습을 계승하는 고참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성공한 어른’이 된 이는 자신이 통과한 희생을 삶의 밑천으로 착각하기 쉽다. 반면, 스스로 그렇지 않은 어른이라고 느끼는 이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두고 ‘더 많이 희생했어야 한다’고 후회하거나, 아니면 성찰과 회고를 기피해 버린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세월에 실려간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나서 ‘청소년은 나의 과거’임을, ‘모든 어른은 한때 청소년이었음’을 잊으며, 어려서 행복함을 충분히 겪지 않았기에 행복해 하는 법을 상실하고 산다.

  구미시 지역사회는 위에 나온 한국사회의 일반적 현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가 지역사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10~2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거의 없다. 일례로 구미시는, 예나 지금이나 ‘명문학교’라는 화두에 꽂혀 있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는 물론 ‘무엇이 명문인가?’라는 질문은 생략하고, ‘학벌피라미드의 윗부분에 얼마나 많은 지역사회 청소년들을 편입시켰느냐’에 사활을 걸며, 그 유일한 방책으로 ‘명문학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도시의 성장과 여론의 다원화, 학교 수의 증가에 따라 점점 커지고 있는 ‘고교평준화’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구미시의 청소년들은 중학교 시기에는 고교비평준화제도 하에서 일찍부터 서열주의를 강요받는다. 그후 고등학생이 되어 교과 학습 이외의 활동에 맛을 느끼고 열을 올리는 건 아예 자살행위로 치부되곤 한다. 여기에서, 가정과 학교 이외에 제일 큰 축을 형성하는 ‘구미시’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청소년 참여율을 끌어올리지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명문학교 육성론의 외장재인 ‘명품교육론’으로 구태의연한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역사회는 지금 제도권 교육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않고 있다.

  버겁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른보다는 청소년들이 먼저 공을 끌어안아야 한다. 청소년 권리에 대한 지역사회의 역할은 바로 거기서, 청소년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회피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비틀즈의 존 레넌이 역설했듯 “서른 넘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이다. 아무리 배려심에 가득찬 어른일지라도 그가 청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보호 내지는 존중일 뿐이다. 그 어른은 결코 청소년의 처지가 될 수 없다. 자녀가 청소년인 어른이라면 더 그렇다. 부모와 자녀는 상호 돌봄의 관계만큼이나 적대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이를 현명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방법이지, 결코 그 적대관계를 은폐하는 게 해법일 수는 없다. 하여, 청소년들이여, 어른들에게 (기본적으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라. 권리는 자신의 손으로 싸우고 일궈서 품어야 한다.

 
상하좌우로 꿈적도 하기 힘든 벽 속 벽돌에 가까운 청소년들에게 가혹한 주문을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오늘도 청소년 권리의 증진을 목적으로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보이는 틈새란 틈새에는 모두 손길을 뻗치며, 자신부터 분발해야 한다. 아시겠지만 부모와 교사는 완벽한 척할수록 허점을 드러낸다. 어른들은 어리석다. 어른들을 지도해야 한다.

  근래 ‘창의적 체험활동’이 입시에서도 중요한 평가척도가 되면서 청소년의 사회참여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참여하는 청소년이 자신의 ‘스펙 쌓기’에 골몰한다면, 참여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올바로 재생산되지도 않는다. 일단 청소년은 집단적 행동과 의사 표시에 주력해야 한다. 자신의 흥미와 진로에 따라 각종 모임을 만들고 내부에서의 활발한 토론과 어른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문제제기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어른의 청소년 정책도 온전하게 출발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실장(반장)을 선출하고 전교 학생들을 대표하는 임원을 뽑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선출된 이들은 주로 학교 본부측의 방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거나 학생이 학생을 통제하는 역할에 머물게 된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단연 학생회의 민주화에 있겠으나, 그것 이외에도 지역사회라는 터전을 통해 다양한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다. 학교 단위가 아닌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확립하는 별도의 모임 또는 기구를 생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할 수 없다면 방과후에 시도하면 되고, 그조차 힘들면 방학을 기회로 삼는 건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굳이 제안하지 않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청소년으로서 권리를 움켜쥐기 위해 고심하고 실천하는 청소년들이 있는 만큼 실마리는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구미시에서 조례에 따라 설치·운영하는 청소년 관련 위원회에 청소년위원이 전무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사자가 배제되니 청소년이 마주한 곤경과 열악함에 아랑곳 없이 자연스레 지역사회의 어른들은 연신 ‘선도’와 ‘성적’만을 되풀이한다. 기성의 위원회 청소년을 위촉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지만, 행정 당국의 손에 걸려 있는 사안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말고, 청소년 스스로 자생적인 위원회를 만들 필요도 있다. 아니, 행정의 틀 안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도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광야로 뛰어나가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어차피 부여받은 시간은 길지 않다. 어른들이 제공한 프로그램에 얽매이지 말고, 원점에서부터 원하는 것을 시작하는 작업에 사활을 걸어볼 만하다. 

  일단은 자신의 취미와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모임을 결성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덧붙이자면 그 다음에 공익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싶다면 ‘가장 쉽게 시작하여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시발점으로 삼으면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앞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을,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사건을 알리는 일에 뛰어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때로는 혹은 자주, 주장보다 사실이 더 큰 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청소년 시청’, ‘청소년 시의회’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기구가 제자리를 잡으려면 민주적인 대표자 선출과 운영이 보장되어야 하고, 이에는 행정과 지역사회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뒷받침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하다못해 하는 흉내라도 내면 어떤가. 얼마간의 인원만 모인다면 ‘모의 시청’, ‘모의 의회’로 바람을 잡는 건 가능하다. 

  지역은 행정단위에 따라 갈라지고 형성되지 않으며, 사회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지역사회를 형성하지 않으면, 지역사회는 청소년 정책의 발전을 향해 한걸음도 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역사회는 어른이 할 일은 없는가? 힌트는 앞서 나왔다. 참여와 자치를 향한 청소년의 걸음 앞에 길을 터주는 것이다. 여건상 지역사회에는 법률을 개정할 만한 권력은 없다. 또 한국의 지방자치는 자신의 지역만이라도 청소년 투표권 등에서 진전을 만들어낼 만한 제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렇듯 여러 가지 제약이 도사리지만, 우선 지역사회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부터 청소년 인지적 관점에 맞게 손을 봐야 한다.

  청소년은 ‘학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학생이 아닌 청소년도 있고, 학교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학교에 머물러 있는 순간에도 그의 정체성 전부는 ‘학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사회나 지자체는 청소년의 1차적 정체성을 ‘학생’에 둔다. 각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청소년 시설은 ‘각급 학교를 통해 이용하려는 자’에게 우선권을 주게 되고, 청소년들의 자치 활동은 뒷전으로 밀린다. 사례가 이뿐이랴. 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청소년 사업의 점검을 건너뛸 수 없다.

  또 하나 반성하자. 생각해주는 체하면서 청소년을 ‘졸’로 보는 태도다. 분명히 해두자. 청소년을 무시하는 이유는 청소년의 미숙함에 있지 않다. 잘라 말하면 청소년은 투표권도 없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강하게 제한받고 있다. 권력의 문제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어른은 청소년 정책을 수립할 자격이 없다. 청소년 문제는 청소년이 가장 잘 안다. 그 어떤 해법도 내부에서 노력한 만큼을 따를 수 없다. 청소년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비켜서주는 게 청소년 정책의 첫걸음이다.

  우선 시는 청소년 관련 각종 위원회에서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거나, 아니면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공동으로 수립해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지도·보호·육성이나 청소년 시설의 건립과 관리 이전에,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아야 할 권리들을 시나 의회가 조례 제정 등으로 정립하는 일도 절실하다. 물론 여기에 청소년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1) 지방자치의 진보와 지방재정법의 개정에 의해 향후 시행되는 주민참여예산제에서도 청소년은 일정 이상의 지분을 얻어야 한다.

  민간단체도 스스로를 돌아보길 바란다. 본인이 기억에 남아 있는 청소년에 관련한 사회단체 사업 중 가장 최악은 올해 모 학교에서 열렸다던 ‘안보 강연’이다. 이 강연의 실내용은 ‘반북 강연’이라고 해야 옳은데, 문제는 ‘안보’를 참칭하고 있다는 점이며, 시의 보조금까지 받아서 개최되었다는 데 있다. 청소년들을 두고 늘 ‘아직 정치적 결정을 하기엔 미숙한 나이’라고 언급하면서도 정작 당파적인 견해를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있는 게 기성세대의 자화상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건, 재미도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모 극우단체의 강연에서 담요까지 덮어놓고 조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화제가 된 적도 있지만, 대체로 이런 강연에서 청소년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귀중한 시간을 따분함이나 잠에 젖어 흘려보내야 한다. 

  안보강연은 일례일 뿐이다. 민주적이고 참신한 교육내용도 청소년들에게는 압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은 자신에게 좋은 약이 남에게도 좋으리라는 편견에 익숙해져 있다. 청소년들에게 권위주의적 교육을 행사하는 성인들은 대체로 본인들 역시 권위주의적으로 이념을 형성하는 법이다. 이것도 타산지석이라는 측면에서는 본보기는 본보기다. 그러나 타산지석은 그 홀로 있는 한 타산지석이 되기 힘들다. 어른들이 형성한 다양한 단체는 청소년들 앞에서 경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청소년과 어른 간의 치열한 토론은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다양한 노선의 부대낌과 어우러짐이야말로 지역사회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