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으로 자라난 길

칼라TV와의 재회

2009년 4월 나는 진보정당활동을 그만두었고 KBS 아카데미의 구성작가 과정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라디오PD가 되겠다는 꿈을 세워놓고 있었고, 그런 동시에 언론노조에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반드시 PD만이 길은 아니었다. 나는 구성작가에도 끌리고 있었고, 구성을 배우는 게 좋은 PD가 되는 데도 능히 도움이 되리라고 봤다.

과제를 수행하며 나는 강사로 들어온 선배 구성작가들에게 곧잘 칭찬을 들었지만, 그들이 끝내 내게 들려주는 말은 한결 같았다. "작가하지 마라. PD 준비해라. 남자가 하기 힘들다." 그나마 쇼오락프로에는 남자 작가들이 드물지 않았지만, 다큐나 라디오 쪽은 그렇지 않았다.

그해 9월 과정을 이수하였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다. 같이 수업을 들은 아이들은 "오빤 곧바로 취직할 거 같아요"라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역시 PD시험 준비만이 갈 길인가? 그무렵 나는 촛불시위에서 두각을 드러낸 '칼라TV'의 지인에게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그럼 쌍용차사태 다큐를 만들자"는 역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칼라TV에 가담한 것이다.



나는 칼라TV 스탭 가운데 평택 쌍용차투쟁의 현장에 없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동료인 '기타맨'은 바로 그점 때문에 냉철하게 구성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원래 현장에서 겪지 않은 일을 정리하는 것이 버거운 '경험주의자'였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은 '역사'로 느껴질 만큼 시간이 흘러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사건진행의 파악부터 관점 정립까지 계속해서 헤매었다. 그러면서 촬영한 테이프 200개에 파묻혀갔다. 경찰헬기 소리와 용역깡패들이 쏘는 새총 소리, 그리고 조합원들의 강경한 투쟁현장 등이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처절한 하나의 전쟁이었다.

77일의 파업은 1막이었을 뿐이라 이내 추가 취재에 나섰다. 쌍용차 조합원들을 한둘 만나기 시작했고, 현시기 노동운동의 문제와 해법으로 주제가 번지기 시작했다. 감당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탭들은 궁극적인 지점을 짚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올초 부산, 창원, 마산 일대를 취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감독과 나는 한진중공업 파업과 마창노련 등 노동운동의 역사를 꿰고 있는 한 작가와 창원에서 일하는 쌍차노동자들을 만나러 추운 겨울을 누볐다.

당시 나는 마음이 급했다. 스탭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2009년 12월 하순 선거 출마를 결심했고, 이리저리 오가면서 구미에서의 출마준비와 서울에서의 다큐작업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이미 <저 달이 차기 전에>, <당신과 나의 전쟁> 등 쌍차 관련 다큐는 나오고 있었다. 가장 열심히 사태를 촬영했던 칼라TV다운 역작을 내놔야 할 텐데... 하지만 나는 구미에 정착해야 했고, 다큐 작업은 그로부터 조금 지나 멎어야 했다.

구미로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칼라TV 동료들을 만났다. KEC파업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그들이 구미를 방문한 것이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쌍차파업이 KEC파업으로 그대로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칼라TV가 내게 남긴 바는 조금 엉뚱하다. 활동하는동안 방송으로 가는 길보다 노동운동의 앞길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공단도시, 노동자도시인 고향 구미로 내려오면서 쌍용차 조합원들 생각이 많이 났다.

11월 3일 밤 KEC파업을 종일 촬영한 칼라TV 스탭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그대로라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보편적인 탄압과 폭력은 보편적인 저항과 연대를 불러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단절은 실패한다. 지금도 내 곁에는 KEC파업 뿐만 아니라 쌍용차와 그외 내가 학생시절 연대방문했던 여러 농성장 그리고 칼라TV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