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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 진보의 진보

장 조레스와 조봉암의 기일

 


 
1959년 7월 31일, 간첩 누명을 쓴 조봉암의 사형 집행이 있었다. 조봉암은 1950년대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린 정치인이었다. 매캐한 포연냄새 사이로 '평화통일론'을 주창했고 독재여당과 보수야당과 달리 '피해대중'을 대변했다. 조봉암의 표묶음 앞뒤에 이승만 표를 놓고 부정개표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로도 모자랐는지 정권은 조봉암의 사형을 감행했다.

조봉암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옛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고 전향했다. 조봉암은 자본의 전제와 계급의 독재(공산주의)를 모두 반대했다. 유럽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과 비슷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의 법살 뒤 사민주의 노선은 꺾였다. 군부 출신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보수야당 이외의 반대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사실 우익에 가까웠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마저 사형당한 차였다. 합법적인 사민주의 정당이 들어설 자리는 보수야당은 물론 여당조차 정부에 짓눌린 유신시대나, 정권이 나서 관제야당을 지어주었던 제5공화국에선 더더욱 없어졌다. 이동안 싹 트게 된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숨막히는 국가테러리즘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였다. 혹자는 일제시대 항일무장투쟁으로, 혹자는 러시아혁명으로 제 이념의 근거지를 뻗쳐나갔다. 아마 이즈음 가장 뽄새나게 회자된 사회주의자는 '레닌'이었을 것이다.

레닌이 가장 경계한 사회주의자. 그러면서도 흠 잡을 데가 보이지 않는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다. 레닌을 읊어댔던 사람들이 당시에, 아니면 지금에라도 조레스를 알고 있을까? 프랑스가 좌파정치의 한 표본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레옹 블룸이 이끈 인민전선 내각이 '바캉스'를 도입했다든가, 카뮈나 사르트르, 보부아르의 활동이라든가, 전두환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 "프랑스는 지금 사회주의"라는 증표로 알려졌던 미테랑 대통령이라든가, 이브 몽땅이 좌파라든가, 프랑스 교사 대다수가 좌파라든가. 그러나 아직 조레스는 한국내에서 크게 유명한 인사는 아니다. 그가 프랑스의 좌파와 노동자가 기리는 인물임에도 말이다.

조레스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중도적인 공화파 정치인으로 출발했다. 다소 보수적 기풍이 남아 있는 시골에서 태어나, 그무렵의 교육 진흥을 타고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그런 그가 정치인으로 선출돼 노동운동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지성적인 정치인이면서도 탁월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중연설은 뜨거웠으며, 의회 발언도 반대파를 강하게 자극하였다.

어디에 주동자들이 있고 어디에 사주자들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귀하가 은밀하게 해체하고자 하는 노조를 조직하는 노동자들, 이론가들, 사회주의 선전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동자들, 중요한 사주자들은 우선 자본가들 사이에 있고 여당 안에 있다.
 -1893년 하원의회 연설

조레스의 사회주의가 여느 정파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다. 그때 프랑스의 사회주의는 백가쟁명을 겪고 있었다. 이 가운데 그는 연하의 스승인 고등사범학교 사서 뤼시앙 에르와 교류하면서 조레스식 사회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조레스의 사회주의를 듣고 혼란을 느낄 것이다. 조레스는 개인주의자였고, 그 개인주의의 논리적이고 완전한 구현이 사회주의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의 주체가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보았고 그 집합인 '크나큰 다수'가 변혁을 추구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급 독재'를 반대했다. 장 조레스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척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가된다. 다만 그는 계급혁명도 결국 민주주의의 한 운동이라고 해석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운동에서 그는 혁명주의와 각을 세우는 개혁주의 진영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혁명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결국 이러한 특유의 '혁명적 개혁주의'는 사분오열된 프랑스 좌파진영을 모아냈다. 그는 또 독일 등 해외의 동지들에게 받은 권고를 무작정 수용하지 않는, 프랑스식 사회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는 애국주의를 반대했다. 대다수의 좌파들마저 전쟁으로 휩쓸려가던 시기 그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그 귀결로 극우 청년의 총탄에 맞고 1914년 오늘 숨졌다.

장 조레스는 조봉암과의 공통점이 있다. 레옹 블룸처럼 정권을 잡은 정치인도 아니었고, 레닌처럼 혁명을 성공시켜본 이도 아니다. 그것이 한국에 덜 알려진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공간에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현재 전지구적으로 닥쳐온 자본주의의 위기와 전쟁 기운에 전면적으로 맞서싸우는 것이 현 단계 진보주의자의 임무라면, 조레스 그리고 조봉암만큼의 스승은 없을 것이다.

조봉암 선생의 역사적 복권이야 수십년동안 언급된 과제였으니 앞으로 기념사업의 진척을 기대한다. 장 조레스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서양사학자 노서경 박사가 분투하고 있으며, 조레스의 저작인 <사회주의와 자유>, 그의 평전인 <장 조레스 그의 삶>이 그녀의 손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선의의 열정은 대개 끔찍한 지옥으로 비화되었다. 하지만 꺾여버렸던, 그리고 폭력적이지 않았던 조봉암과 장 조레스의 길은 달랐다. 그들이 권력쟁취에 성공했어도 그랬을까? 여러 흠들이 생겼겠지만,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