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중앙정치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좁지 않습니다. 관심과 의지가 있고, 꾸준한 활동이 병행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만 해도 그랬으니까요. 학창시절을 마감한 후 줄곧 서울에 남아, 대중정치인은 아니더라도, 실무자 등으로 중앙정치에 입문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풀뿌리정치에 도전하게 된 것은 '구체적 진보'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에 논평이나 칼럼만 잘 올려도 중앙정치에 기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최전선에서 첨예함을 맛볼 기회는 떨어지더군요. 조선일보 욕하고 보수정당 욕하고, 나름대로 세워왔던 대안을 주장하는 일이, 발전 없이 반복되는 데 대한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진보진영 내부의 정파투쟁도 저를 지치게 하는 만큼 공허함을 선사했습니다. 결국 내가 손수 하는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닌가. 싸워야 할 상대를 보지 않은 채 눈 감고 돌만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시의원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들은 한 선배님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장에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 말이 '풀뿌리'지 동네로 들어가면 힘들어질 거다. 조금 더 큰 싸움에 나서보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일리 있었지요.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애초에 직업정치에 꿈을 두지 않은 제가 판을 더 크게 불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또,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쨌든 제가 선거기간부터 깨달은 것은 '동네 정치'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직까지는 중앙정치보다 어렵습니다. 동지들과 진을 쳐 확연한 전선을 형성해 싸우는 중앙정치와 달리, 동네정치는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상당히 불가능하거나 또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과 지지기반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제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투쟁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경청하고 양보하며 선을 느슨하게 뒤에 그어두지만, 그 선을 침범하려고 할 때는 완강히 저항하거나 공격적으로 나갑니다. 성격분류에서는 '잔 다르크 형'이라고 하더군요. 동네정치보다는 중앙정치에, 정치보다는 사회운동에 걸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동네정치 입문 후 기쁜 순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적 보수'를 만날 때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찾기는 힘듭니다. 합리적 보수란 민주주의에 의거한 체제정통성을 옹호하며, 시장논리 못지 않게 사회통합을 중시하고, 민족과 공동체를 우선으로 두는 이념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친일파-독재의 후예들이고, 근래에는 시장만능주의를 내세우며, 냉전논리를 펼치기 일쑤입니다. 공동체주의자라기보다는 집단주의자, 연고주의자, 패권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부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 10년은 현실이 변한 바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정당에서 대변인을 지내시는 분이 제 말을 듣더니 "지역에 가면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핏 이해를 못했습니다. 선거기간 중에 많은 유권자 분들이 밝힌 의견대로, 지방자치가 지역토호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이 나라의 기득권을 강화시킨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제 그 뜻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배타주의는 버려야 한다. 이제 외국인 거주자들도 적극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밥만 먹으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 마을회관은 복지회관의 성격을 띠어야 하며, 주민들을 위한 쉼터도 중요하다." 얼마 전 만난 지역 유지 분의 말씀입니다. "나는 한나라당 당원"이라고 밝힌 그분은 "우리 동네에서 무소속 의원 둘이 나온 것은 민심의 탁월한 선택이다"라고도 하셨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공동체의 발전에 쓰려는 모색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보수적 도시 구미에서 진보적인 동료를 만나뵐 때마다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와 대면할 때도 뿌듯함을 가지게 됩니다.
구미로 돌아와서 제가 보수층에게 발견한 특이사항은 또 있습니다. 현재 한나라당은 대형마트나 SSM에 대한 규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미에서는 달랐습니다. 당선자 시절에 어느 포럼에 초청받아 참석했을 적에 참석한 모든 당선자들이 대형마트 규제에 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앙정치인과 지역정치인 간의 이념차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지역정치인이 소상인층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구조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영국 보수당의 한 정치인은 보수주의의 기조를 "바꿔야 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바꾸지 않는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이를 뒤집으면 "바꿔야 할 것은 바꾼다"일 겁니다. 보수가 '수구'와 다른 점은 개혁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로 개혁해야 할 부분을 찾는 보수. 이러한 보수가 김구의 암살과 장준하의 의문사로 끊긴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명맥을 이어야 합니다.
합리적 보수의 등장은 진보주의자에게 긴장을 가져다 줍니다. 2006년 민주노동당 주류는 북핵비판 성명을 부결시킨 바 있습니다. 지나치게 '특수성'에 몰입하다가 생겨난 결과인데, 이는 한편으로 극단적인 반북반공에 의존한 비합리적 보수에 대한 반사작용이기도 하지요. 그런 만큼 합리적 보수가 김구와 장준하처럼 민족화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진보주의자들은 북한 노동자의 권리를 비롯한 북한 인권, 상호군축과 같은 평화체제 실현으로 길을 터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스웨덴 복지를 볼까요? 스웨덴 복지는 잘살고 난 다음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성장과 분배의 동시 진행이었는데, 초창기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한몫했습니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 및 좌파정당의 요구를 수용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전시에 유태인들을 대피시키려 안간힘을 쓴 이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친일파와는 완전히 다른 보수우파죠. 이런 보수우파와 경쟁하고 교섭하려면 진보주의자도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스웨덴의 진보좌파는 소위 렌-마이드너 모델, 예컨대 '동일노동-동일임금'이나 '임노동자기금' 등과 같은 정책을 내놓으며 분투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집권했습니다. (북유럽이나 서유럽은 미국과 달리 사회주의(사민주의) 정권이 자주 들어섭니다.)
지역에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합리적 보수가 풀뿌리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노력할 때, 진보는 구체적인 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테니까요. 이를테면, 그저 "나는 민주화세력이다"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참여제도를 구상하게 됩니다. "나는 노동자 편이다"라는 구호에 머물지 않고 '공공부문의 모범적 정규직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구미시의회의 대다수 의원들은 보수 성향입니다. 다만 대다수 분들이 학교무상급식을 비롯해 여러 부문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신 것을 인상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이 자세가 지속된다면 많은 성과들이 주렁주렁 열리겠지요. 물론, 저 같은 쪽이 누릴 반사이득은 점점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구체적인 진보 노선을 개척할 동기가 되고, 그만큼 저는 더 든든해진다는 역시도 알고 있습니다. 저의 기대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KEC 파업, 구미 보 부실시공, 학교무상급식, 주민자치위원회 설치 등 여러 현안들이 우리 구미시의회에 다가온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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