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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6) 캐쥬얼 등원의 전말

서울에서는 예전 대학 시절 어울렸던 너댓살 많은 학과 선배들도 만났다. 4, 5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형들도 있었다. 갑자기 시의원 당선자가 되어 나타난 나를 다소 어리둥절하게 맞으면서도 ~ 구미에서 어떻게 당선되었냐며 신기해 했다. 그들과 맥주를 기울이며 월드컵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형들은 여전했다. TV 속 중계보다 그 형들의 해설이 더 재미있었다. 그 뒤로 그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형들은 SNS를 통해 가끔 의정활동을 응원했다.

 

한편 개원이 다가오면서 구미시의회 의장단 선거는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슬쩍 예상하기에도 허복 의원이 우세했다. 부의장으로 나선 김영호 의원 등 을지역 무소속 의원들이 가담했고 친박연합도 그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황경환 의원과 손홍섭 의원은 다섯 표를 넘길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캐스팅 보트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후보로 나선 의원들은 끊임없이 내 한 표를 요청했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당선자가 아니었다. 의장 후보들의 등살에 괴로워하는 또 하나의 유권자였다.

 

하루는 저녁에 민노당 김성현 의원에게 전화가 왔다. “별 일 없는가?” “없는데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요? 누가 찾아왔습니까?” “그래, 의장 후보가......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는 형곡동 민노당 사무실이었다. 누가 찾아왔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황경환 의원이었던 것 같다. 나도 풀뿌리사랑방에 있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 얼른 사무실 셔터를 내리고 퇴근해버렸다.

 

하지만 며칠 뒤 낮에 찾아온 황 의원은 피할 수 없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박교상 의원, 김성현 의원하고 셋이서 움직이기로 했다는데 사실인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박 의원과 김 의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었고 반드시 내가 선택을 같이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기로 잠정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허복 의원도 연신 전화를 걸어왔다. “김 의원~ 시원하게 답 좀 줘봐. 나도 애가 타.” 아마 당시 의원들 중에 정보에 가장 어두웠을 내가 내다봐도 허 의원이 의장에 오를 것 같았다. 이미 게임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공을 들이는 그를 보면서 기초의원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라고 깨달았다. 같은 4선이면서 나이가 10년 가까이 많은 황 의원이 허 의원에게 양보를 종용했지만 허 의원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회 안팍에서는 한 번 의장을 역임한 황 의원이 너무 욕심을 내는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의장 선거로 괴롭던 나날에, 구미 공단의 KEC에서 돌발 사건이 터졌다. 지방선거 직후쯤 금속노조 KEC지회는 단체협상 와중에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 없는 당선자 일정에 지쳐 방문을 미루고 있었는데, 630일 일이 터졌다. 기숙사에서 농성중인 조합원들이 용역 깡패들에게 내쫓겼고 사측이 직장폐쇄를 단행해버린 것이다. 나는 파업 초창기 으레 단협 과정에서 있는 파업이라고 받아들였었다. 다만 이명박 정부가 노조 전임자의 수와 임금을 규제한 타임오프를 밀어붙였고 금속노조 KEC지회가 이를 사업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노사간 쟁점이 된 것이 특기사항일 따름이었다. 더구나 노조는 타임오프 관련 요구 사항을 철회할 의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측이 초강경수를 동원한 것이다.

 

KEC의 파업은 오랜만에 벌어진 일이었고 일각에서는 사측도 온건한 편이라 이 같은 대립이 이례적이라는 평도 있었다. 자연히 사측의 강경 진압 배경에 의문부호가 찍혔다. “이 정도로 나오는 걸 보면 이제 사측이 노조를 박살내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은 사석에서 KEC 사측 관계자에게 이번에는 그저 넘기지 않겠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하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KEC는 광평동 수출탑을 지나자마자 구미공단 입구에서 나타나므로 시민들에게 친숙한 기업이었다. 공단이 조성된 직후에 들어서 향토기업 1로도 통했다. KEC 맞은편은 코오롱인더스트리였다. 이곳에서도 2005년부터 정리해고 철회 투쟁이 진행된 바 있었기에 KEC 노사갈등을 코오롱과 혼동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30일 낮 KEC 정문앞 농성장을 방문했다. 한 남자 조합원이 다가와 어디서 오셨냐며 수상한 듯이 물어왔다. “아 저는 경북일반노조 조합원입니다.” 그때 나와 안면이 있는 노조 활동가가 다가와 소개했다. “, 이 사람은 이번에 당선된 김수민 시의원이야.” 경비 건물 앞에 선 채로 상황을 공유했다. 남녀 혼성으로 100여명인 사측 용역이 기숙사에 난입한 시각은 새벽 140분경이었다. 노조에는 여성 노동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임신 3개월째인 여성도 있었다. 조합원들은 저항하면서 용역들의 모습을 촬영했고 용역들은 여성 노동자의 가슴을 움켜쥐기까지 하면서 노동자를 끌어냈다. 여성 용역이 남성 용역에게 그 여자 가슴을 놓으라고 소리쳤고 그 남성은 되레 더욱 욕설을 퍼붓는 장면도 있었다 한다. 작전이 종료된 직후 용역은 기숙사 출입을 봉쇄했다.

 

마침 한 동네에 사는 금속노조 차광호 선배도 현장에 와 있었다. 그는 내게 남아공 월드컵에서 응원 도구로 유행하던 부부젤라를 건넸다. 부부젤라는 노조 집회에서도 유용했는데 나는 그것을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다. 의장단 선거로 한창 괴로웠으니 내일(71) 개원하는 의회에서 불어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그날 밤에는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앞으로의 의정활동 기조를 공유했다. 그런데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한창 논의중이었으니 받지 않았다. 재차 걸려오자 받았다. 모 의원이었다. 나도 아는 어떤 사람들과 모여 있는 중이었던 그는 급기야 수민아라고까지 부르며 꼭 모임에 들르라고 했다. 목적은 뻔했다. 개원과 동시에 있는 의장단 선거였다.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회의는 밤 늦게 끝났는데 그때도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재촉에 못 이겨 원평동의 한 술집으로 갔다.

 

그 자리에서 모인 이들은 특별히 내게 강권을 하지는 않았지만 허복 의원 지지를 요청했다. 태도가 부드러워서 나도 일단은 분을 삭였다. 답을 피하고 술이나 한잔 하고 곧장 일어나려고 했는데 지지 요청이 되풀이되었다. “네가 지지하고 싶은 의원이 있다면 지지해라. , 없다면 허 의원을 좀 밀어도.” 만일 내가 내일 무효표를 던지기로 했다고 즉답했더라도 그대로 나를 놔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벽 2시쯤 귀가했다. 정말이지 불가해한 일이었다. 나는 의원 이름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그가 누구를 의장으로 밀지 체크해 보았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허복 의원이 이기게 되어 있다. 굳이 나를 그렇게까지 귀찮고 괴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당선된 후 흘러간 지난 한 달을 돌아보았다. 너무나 불쾌했다. 나를 지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제 멋대로 재단하고 제 필요에 따라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결국 단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2010년 7월 1일 나는 반팔 와이셔츠에 캐쥬얼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등원에 나섰다. 경고 시위였다. 그날 내 옷차림은 예상 외로 이슈가 되었고 어느 지역 언론에 실리기까지 했다. 보도 내용은 다소 긍정적이었다. 이렇게 화제가 될 줄도 몰랐다. 국회에서 유시민 의원이 세미 정장으로 등원했다가 욕을 들은 것도 옛날 사건이 되어 있었다. 단병호 의원은 작업복 차림으로, 강기갑 의원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등원했지만 별 탈이 없지 않았던가. 내 옷차림이 새삼 화제가 되는 것도 낙후된 지역정치의 방증으로 여겨졌다. 나는 예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으며 무턱대고 의회 안에서 남과 섞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런 속내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뒤로도 한동안 옷차림에 시비를 걸고는 했다. 정장을 걸쳐도 신발이 운동화면 시비,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시비였다. 나는 여름에는 정장 차림을 피했다.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고, 차가 없어서 걷다 보니 옷이 흠뻑 젖을 때가 많았다. 여름에는 회의에서도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2011년인가 2012년에가에는 분홍색 남방을 두고 비난하는 하류 기자도 있었다. 물론 내게는 택도 없는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