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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5) 새로운 정당을 희망했지만

선거가 끝나고 한 차례 서울에 들렀다. 출마 직전 같이 밑그림을 그리고 정책 기조를 짰던 친구들과 선배들이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략히 선거 평가를 진행하며 나는 성공한 선거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인동동, 진미동의 투표자 가운데 35%가 도의원 정당명부 선거에서 야권 정당(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사회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야권 유일 후보로 나섰던 나의 득표율은 21%. 아무리 높게 잡아도 야권 투표자의 60% 가량만 나를 지지했으며 상당수의 야권표가 빠져나간 셈이다. 무소속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속 후보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후보보다 유리할 게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에 들른 김에 임종인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대자보> 편집진이던 김영국 씨가 만남을 주선했다. 초면이었지만 임 전 의원은 나를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그를 높에 평가하는 칼럼을 쓰고는 했다. 임 전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고 민주노동당 의원과 행보를 함께하며 열린노동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종로의 한 생선집에서 큰 체구에 눈빛이 형형한 그를 만났다. 미디어로 본 그는 이따금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어떻게 당선되었냐며 신기해 했고 나는 잘된 선거는 아니었고 제가 잘 나서 당선된 것도 아니다라고 답했다. “MB 덕분입니다. 구미에도 그를 싫어하는 시민들이 많았고 그 시민들 표를 많이 받은 거죠.”

 

그가 내게 특별한 볼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한번 만나고 싶던 청년이라 만남을 청했던 것이다. 2009년 가을 안산 상록을 재보선에 무소속 진보 후보로 출전했다가 15% 득표율에 3위를 기록한 그는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이랑 진보신당이랑 합당할 거 같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합당에 반대고, 합당했을 때 그 당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합당을 하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국민들은 정치권을 여 아니면 야로 보거나, 잘해야 범한나라당, 범민주당, 범민주노동당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당하면 그 당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으로 들어가는 것도 고려중입니다.” 나는 안 들어가셨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본디 민주당 계열의 열린우리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이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생맥주집에서 가볍게 낮술을 마셨다. 그는 김 의원은 영남 출신이라 민주당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 출신이고 민주당이 친정인지라 김 의원처럼 민주당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조금 지나서 실제로 민주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날 그는 내 지향은 야5(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연합의 진보적 정권교체라고 밝혔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개념에 대해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노선을 계승하면서 발전적으로 극복한다고 설명했다. 독자적 진보정당의 발전에 무게를 둔 나와는 명백히 차이가 있었다. 또 지방정치인과 중앙정치인과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와 당을 함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도 나와 함께 하고자 그날 만남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열린우리당에서 유일하게 비정규직법 개악을 반대했던 정치인이었고, 타투 합법화 등 기성 정치의 관심이 못 미치는 소수자 옹호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잘되기를 바란다.

 

임 전 의원 뿐만 아니라 나도 당파적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김두관 경남지사쯤 되는 거물이라면 모를까, 나에게 무소속은 대중적으로 이도저도 아니게끔 비치게 하는 오해의 표지였다. 선거 결과 분석에서도 나왔지만 무소속인 점이 그리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않았으므로 연연할 아무런 사유가 없었다. 빨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민주노동당이 내보낸 후보라는 낭설이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 당내의 NL(민족해방)계열과는 당을 같이하지 않기로 했다. 별다른 다짐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통일지상주의, 민족제일주의는 진보정치의 질곡이었다. 가끔 터지는 북한 관련 사건들은 진보의 원칙에 어긋나는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위상을 실추시켰다.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한나라당의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는 헛소문도 퍼졌다. 훗날에는 네 번 제의를 받았는데 모두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나는 한나라당에게 영입 제의를 받은 바가 전혀 없다.

 

당시 존재하던 정당 중에는 진보신당이 가장 나와 유사한 노선을 가졌다. 내가 20093월까지 진보신당 당원이었던 것을 안 대구경북 지역 진보신당 간부들이 스치듯 복당해야 하지 않겠냐고 입을 연 적은 있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진보신당 입당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선거 때 진보신당 후보로 나오는 것이 옳았다. 사회당행은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진보신당 다음으로 나와 유사한 정당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그 당이 대중정치를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았다.

 

내가 민주당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는 헛소문도 돌았는데 내게 그럴 의사도 전혀 없었거니와 구미 지역 민주당이 나를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구미 지역 민주당은 그야말로 사람 기근이었고, 안장환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당을 외롭게 끌고 가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사실 안 위원장의 위상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안 위원장은 언젠가 농담조로 김수민 의원을 을지역위원장으로 하면 좋겠는데...”라고 했지만 마음에 없는 말이 분명했다. 그들은 내가 그 으로 들어가면 모를까 대등한 위치에서 나를 받을 이들이 절대 아니었고 이는 차차 그들의 행태로 증명된다.

 

구미 지역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은 내가 합류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구미는 공단도시였기 때문에 자연히 지역 민주노동당은 NL계열이 아닌 노조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어서 지역사회내에서는 서로 불편할 것이 없었다. 지역내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나아가 국민참여당까지 동행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고 나도 그 범주 안에서 사실상 함께했다. 그러나 같은 정당에 몸담는다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재 있는 정당에 입당하지 않는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명분을 지키려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소속으로 영영 남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였다. 새로운 정당이 생기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기성정당들이 다을 재편하며 개명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재편 가능성이 그나마 보이는 사례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합당이었다. 임 전 의원과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합당에 반대했다. 그렇다면 비NL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합당하는 경우가 남아 있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였다. 아예 새로운 정당이 생길 가능성은? 나는 "기회가 닿으면 당을 만들겠다"고 공언했으나 그때는 여지가 없는 듯했다. 주변 사람 몇몇과 대화를 나누며 녹색당이 창당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기도 했지만 녹색당은 1990년대부터 계속 창당에 실패하고 있었다.

 

활로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한국에도 지방정당이 허용된다면 구미 지역내에서 내가 앞장 서 당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요원한 일이다. 항간에서는 구미풀뿌리희망연대가 지방정당에 준하는 조직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와 민노당 김성현 당선자는 구미풀뿌리희망연대의 운영위원이었고 두 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풀뿌리희망연대는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나에게 붙는 수식에도 풀뿌리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풀뿌리희망연대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YMCA, 참여연대, 농민회, 전교조, ‘사람사는세상’, 참교육학부모회가 참여하던 시민단체 연석회의였다. 선거에서도 지지 선언 없이 정책제안과 각 후보자별 수락내용만을 발표했었다. 내 성향이야 어떻든 그때 나는 그냥 한 명의 무소속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