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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4) 의장 후보들의 파상적 구애

한편 점점 가열되던 구미시의회 의장단 선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라 있었다. 당선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내 처지에,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다른 선거에 열을 올리는 이들이 머리로는 몰라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의장단 선거에서 내 한 표는 무거웠다. 구미시의회에 야권 의원은 3명이었다. 다른 20명은 한나라당이거나 친박연합이거나 무소속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끼리의 싸움이 되고 나면 야권 의원이 결국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처음 접근해온 의원은 <매일신문> 연찬회를 했던 그날 만났던 한나라당 황경환 의원과 같은당의 김익수 의원(신평, 비산, 공단, 광평)이었다. 김 의원은 이런저런 인맥으로 신호를 보내왔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구미경제정의실천연합에서 김 의원의 전력을 들어 의장됨에 반대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음주운전 경력과 폭행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결국 김 의원은 의장 선거를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당선증 교부식날 “뭉치자”고 결의하던 몇몇 비-한나라당 의원들은 단결이 쉽지 않은 듯했다. 모처에서 비-한나라당 의원 13명이서 회합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나는 가지 않았고 그날 몇 명이나 왔는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비-한나라당 의원 단결론을 믿지 않았다. 비-한나라 의원의 절대 다수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거나 한나라당과 색깔이 다르지 않은 친박연합 소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토대가 없으니 서로 거래가 잘 될 리 없었다.

 

의장단 선거를 맞이해 구미시의회는 여섯 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한나라당이 갑지역(김성조 국회의원파)과 을지역(김태환 국회의원파)으로 나뉘어졌다. 의원 6명인 갑지역 한나라당은 3선인 김익수 의원이 의장선거를 포기하면서 4선인 허복 의원(상모사곡/임오)을 내세웠다. 의원 네 명인 을지역 한나라당에서는 4선인 황경환 전 의장이 나섰다. 또다시 의장을 역임하는 데 부담감이 있는 눈치였지만 황 의원은 ‘황고집’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자신있다”며 출마를 밀어붙였다. 세 번째 부류는 4명이 있는 친박연합이었다. 이들은 비-한나라 연합을 성사시키던가 아니면 한나라당 일부가 손을 잡아야 할 처지였다.

 

무소속에서는 3선인 김영호 의원(양포, 산동, 장천, 도개, 해평)과 손홍섭 의원(형곡)이 나섰다. 두 사람은 예상대로 단일화 합의를 보지 못했다. 무소속은 갑 지역 무소속과 을 지역 무소속으로 쪼개졌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무소속 의원들은 모두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했던 이들이니, 갑 지역 무소속은 갑지역 한나라당 의원과 한편을 이룰 수 없었고, 을지역 무소속도 마찬가지로 을지역 한나라당 의원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소속끼리 연대를 하지 못한다면 남는 건 ‘엇갈린 지역간 연합’, 즉 갑지역 한나라+을지역 무소속과 을지역 한나라+갑지역 무소속이었다. 중간중간에 김영호 의원 등 을지역 무소속이 갑지역 한나라당과 제휴할 것이라는 예측이 들려왔다. 반면 갑지역 무소속은 서로 뭉치지도 못했고 딱히 연대 대상을 잡지도 못했다. 이 과정에서 손홍섭 의원이 고립되었다.

 

여섯 번째 부류는 그야말로 ‘나머지’로, 무소속인 박교상 의원(형곡), 민주당 김정미 의원(비례대표), 민주노동당 김성현 의원(도량, 선주원남) 그리고 나였다. 의장단이나 상임위원장단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다. 김정미 의원은 계속 침묵 모드였기 때문에 행동을 같이할 수 없었다. 나와 박교상 의원, 김성현 의원이 의장단 선거에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박 의원과 절친한 분이 민주노총 간부인 인연을 통해, 박 의원은 나와 김성현 의원과 조금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루는 의회에 나갔더니 박 의원이 나를 불렀다. “김 의원은 어쩔 셈인가. 의장선거 말이네.” “아직 못 정했습니다. 지켜보고 판단하려고요.” “비-한나라당 연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모임에 나갈 건가?” “아뇨. 지켜봐야죠.” “그래, 나도 안 간다.” 그러더니 박 의원은 “끝까지 지켜보고 찍어라. 비-한나라당이라고 무턱대고 밀어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처음에는 박 의원이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어 경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조언은 내가 취하려던 행동과 일치했다.

 

김영호 의원은 부의장 쪽으로 정리된 것 같았다. 갑지역 한나라당과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허복 의장-김영호 부의장으로 진용을 편성한 것이다. 의장 선거는 허복-황경환-손홍섭 3파전이 되었다. 세 후보 모두 구애가 거세었다. 여러번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2/3쯤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피하다 전화를 받으니 직접 만나자고 했다.

 

황 의원은 사무실에 연거푸 찾아왔다. 당시 의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의회사무국의 수행 공무원과 함께였다. 황 의원은 “나는 고집이 세다. ‘황고집’이라고들 하지 않냐. 전에 남유진 시장과 싸우고 수십일동안 교류를 끊을 정도였다. 믿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저는 학교무상급식과 주민참여예산제를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습니다. 무상급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정중히 질문했다. 황 의원은 “의원이 하는 일 의장이 도와야지”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반대 의원이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는 그쪽도 도우실 겁니까?’라는 질문이 앞니까지 치고 올라왔다.

 

황 의원쪽에 선 같은 지역구(인동, 진미) 윤영철 의원도 나를 찾아왔다. “나이도 가장 많으시고 4선 의원이다. 김 의원도 그렇고 우리는 을 지역이지 않느냐. 을 지역끼리 도우면 얼마나 좋냐”고 설득했지만 나는 승낙하지 않았다. 윤 의원은 “김태환 국회의원이 나더러 김수민 의원 만나라더라. 내가 그래도 조금 젊은편(66년생)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거꾸로 황 의원을 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나는 지역의 반-김태환 여론을 등에 업고 당선된 입장이기도 하다. 내가 황 의원을 돕는 건 김태환 국회의원을 돕는 꼴이니 선거로 나타난 여론과 내게 투영된 민심과는 어긋났다.

 

원래 나는 진보 성향 2명 의원을 빼고 다른 의원은 성향이 거기서 거기라고 본 탓에 의장 후보로 한나라당 의원이든 무소속이든 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도 의장으로 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밀려니 부담이 되었다. 혹 이것이 나와 한나라당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나 않을까 했다. 의장 후보군 중 무소속은 손홍섭 의원이 유일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엄청나게 전화를 걸어왔고, 부친을 통해서 나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손 의원은 당시 무소속이었기 때문에 손 의원을 지지하는 것은 황 의원을 미는 것과는 달리 크게 무리가 없었다. 손 의원이 선거에서 학교무상급식을 전면에 내건 것도 호감 요인이었다. 하지만 당선가능성이 희박했다. 누가 손 의원을 지지할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물론 일체감이 든다면 떨어지더라도 밀어줄 수 있다. 허나 나는 -다른 의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손 의원이 어떤 인물인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개원인 7월 1일을 목전에 두고서야 손 의원과 나는 독대했다. 그는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내밀며 “NGO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허복 의원도 집요했다. 내가 그처럼 광평초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나에게 허 의원을 찍으라는 권유도 들어오곤 했다. 형곡동에 있는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 허 의원과 김성현 의원, 나 이렇게 셋이 만났다. 허 의원은 “학교무상급식은 초등학교만이라도 하긴 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는 보수 성향 의원인데 진보 성향 의원하고 잘해보고 싶다”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그에게 마음이 조금 기울었다. 대중선거도 아닌 의장선거인데 단지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해서 찍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즈음 지역언론에서는 K고 동문회가 허 의원을 민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가 나온 구미고 동문회였다. 실제로 동문회 간부들은 허 의원을 밀었고 내게도 완곡하게나마 거듭 지지를 요청했다. 허 의원은 다른 고교를 나왔지만 구미고 동문회 간부들과 연이 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허 의원을 지지할 수 없었다. 젊고 무소속인 의원이 마치 고교 동문들에 의해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듯한 그림이 거슬렸다. 황경환 의원을 도운 윤영철 의원처럼, 허 의원을 미는 구미고 동문회 간부들도 거꾸로 내가 뒷걸음치게 만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