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복기, 의정활동 4년

(2) 아무 근거 없는 삼성전자 몰표설

당선 후 그다지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지만 작은 기쁨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당선자 신분으로 보낸 2010년 6월은 답답함과 짜증으로 보낸 한 달이었다. 나를 제도 정치권에 떨궈준 지지층은 빠르게 흩어졌고 동네에 별 연고가 없던 나는 그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선거 기간 나를 지지하지 않았거나 내게 무관심했거나 나를 무시했을 사람들부터 먼저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나를 한 세력의 대표자로서, 이념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기간에 돌아다녔던 “민주노동당의 위장 후보”라는 입방아도 빠르게 사라져갔고 거꾸로 내가 ‘무’소속임을 빌미로 마치 ‘무색무취’한 노선의 정치인인 것처럼 대접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은 내게 “한나라당에는 천천히 입당해도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충고나 일삼았다. 어떤 나이 지긋한 이는 “난 처음엔 김수민 후보가 근로자(민주노조를 뜻한다)들이 낸 후보인 줄 알았지”라고 말했다. 선거 당시에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가 아니었던 나는 선거 직후 민주노총 경북지역일반노조에 가입했다. 시의원이 왜 노조에 가입하냐는 반문은 사절이다. 독일의 보수 성향 정치인인 메르켈 총리도 “나는 노동자고 가능하면 노조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나마 내가 인동, 진미 지역에 연고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면 받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 직후 내가 부재중인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 어머니가 받았다. 지역사회 유지인 것 같은데 그리 기꺼운 기색은 아니었고, 내가 없어 별 말은 없었다지만 다소 훈계조의 목소리였단다. 그가 밝힌 조금의 이력과 목소리에서 읽히는 연령대를 들어보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답답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지역사회를 주름 잡는 입장인데 자신이 전혀 모르는 젊은 사람이 시의원이 되었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연고가 없는 만큼 지역사회에서 걸릴 게 없기도 했다. 토호들 입장에서는 제어가 거의 불가능한 정치인이 탄생한 셈이었다.

 

한편에서는 나의 당선에 대한 불복 심리가 교묘하게 표출되었다. 내가 삼성전자 기숙사에서 몰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그 몰표가 없었다면 당선은 어림도 없었다는 소리가 퍼졌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구미시의원 선거의 개표는 투표구별이 아닌 동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구역에서 어느 정도 표가 나왔고 몇 위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인동동에서 20% 득표율로 3위, 진미동에서 24% 득표율로 2위를 했다. 여기까지가 집계된 전부다.

 

삼성전자 기숙사 주민들은 진미동 제1투표구(진미동사무소)에서 투표를 했다. 이곳에서 내가 몇 표가 나왔는지는 상상과 추측의 영역일 뿐. 삼성전자 기숙사를 비롯해 진미동에는 젊은 주민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반-한나라 성향의 유권자가 상당했는데, 청년층은 후보자에 대해 깊이 알고 찍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도 규모가 작은 지방선거에는 밝지 못했고 당일 투표소에 가서야 기표 대상을 정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후보 셋이고 무소속 후보 둘이니, 이런 유권자들 다수는 무소속 후보 둘 중에 하나를 즉흥적으로 택일했을 수도 있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가 진미동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나는 진미동 뿐 아니라 인동동에서도 3위를 하며 당선권으로 들었었다. 그럼에도 진미동의 특정 투표구에서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는 것은 투표해준 지지자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인동동 어디에서 선전했는지 역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나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하면 구평동에서 비교적 표가 많이 나온 것 같았다. 실제로 선거 직후 어느 구평동민들은 “우리 동네에서 많이 찍어드려서 당선에 공헌했죠? 잘 부탁드려요”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데도 내가 삼성전자 기숙사 몰표로 당선되었다는 말이 한동안 나돌아다녔다. “젊은 사람들이 젊은 후보를 찍었다”는 막연하고 자의적인 분석이 동원되는가 하면, 내가 삼성에 다니는 사원이라서 표를 많이 얻었다는 헛소문까지도 있었다. 나는 삼성전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훗날 몇몇에게 물어보니 “김수민 의원 찍은 사람 그리 많지는 않을 것.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매일신문>이 여는 당선자 축하 연찬회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였으나 선거 기간 비교적 각별한 관심을 가져준 기자가 간곡히 초청해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당선자의 차를 얻어타고 대구로 향했다. 거기서 김태환 국회의원을 처음 만났다. 행사장 옆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밑에서 한나라당 시의원들이 그에게 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가 먼저 내게 인사를 청했다. 나는 이후로도 국회의원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자리를 돌다 내게 다가오면 그때 인사했다. 이것은 구미 지역구 한나라당 국회의원 뿐 아니라 야당 국회의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식이 끝나고 코스요리의 전채로 보이는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몇 의원들이 나를 잡아끌었다. 이만 구미로 돌아가기로 하고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국밥이나 한그릇 들자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이런 코스 요리를 자주 먹었나 보지? 요리에 눈이 돌아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식사는 휴게소가 아닌 구미의 한 식당에서 소고기를 먹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얼마 전까지 의장을 지냈고 의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려는 황경환 의원(양포, 산동, 장천, 도개, 해평)의 제안이었다. 대구 가는 길에서부터 동행했던 의원들도 함께였다.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싶어 소고기를 먹으며 황 의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당선증 교부식날 비-한나라당 연대를 결의하던 의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당선자 시절 이런저런 행사에 많이 불려다녔다. 초청자들은 내심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당선되었으니 얼굴 비치라’고 고압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간곡하게 “자리를 빛내달라”고 말하니 거절하거나 사양하기 참 힘이 들었다. 그때 들른 행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지역언론이 당선자들을 초청해 주최한 토론회였다. 사회자는 “당선자들 공약을 읽어봤는데 이거 다 되면 구미는 천국되겠다. 그냥 남발한 공약이 있는지 앞으로 지켜보겠다”며 엄포부터 놨다. 당선자들 표정이 굳어졌고, 몇몇은 아예 눈을 감았다. 행사 컨셉트도 잘 파악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점차 정책토론회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골목상권 문제가 행사 주제가 되어버렸다. 나는 당시 한창 들어서던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우려를 표하며 규제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밝히다. 다른 참석자들도 대형마트 및 SSM 규제와 전통시장 보호에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 당선자가 “전통시장쪽도 분발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상모사곡동, 임오동의 한나라당 김상조 의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테이블 위 마이크가 어느새 원평동, 지산동, 송정동의 친박연합 이수태 의원 앞에 있었다. 김 의원은 ‘규제도 규제지만 전통시장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이를 스스로 만회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이 의원은 그것이 ‘전통시장 탓’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 의원은 연신 공격을 가했고 김 의원은 쩔쩔 매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 의원도 목소리 높은 것으로는 남에게 쉽게 뒤지지 않았다. 나는 후일 김 의원에게 “그날 어떻게 그렇게 참으셨습니까”라며 껄껄 웃곤 했다. 그랬던 이 의원과 김 의원은 막상 의회에서 대립한 적이 없고, 2012년 7월부터 2년간 같은 방을 쓴다. 이 의원은 식사 자리에서 “대통령이 기초의원에 대해 뭘 알겠어? MB가 상모동에 시의원으로 출마하면 김상조한테 박살날 걸?”이라며 김 의원을 추켜 올리기도 했다. 인간관계는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