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1일자 <한겨레21> 표지를 본 사람들의 상당수는 고개를 갸웃했을 것입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우선 어깨띠에 적힌 글자로 그의 이름을, 그가 선거 출마자임을, 무소속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득중, 그는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입니다. 현재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기도 합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에 맞선 옥쇄파업의 당사자입니다. 동료 스물 다섯명이 세상을 떠난 이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노동자, 활동가입니다.
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야트막한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송국의 아카데미에서 방송 구성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나서 촛불시위 생중계로 유명해졌던 '칼라TV'에 2009년 9월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맡겨진 임무는 그해 있었던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파업 현장에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스탭들이 치열하고 부지런히 촬영한 결과가 2백여개가 넘는 테이프로 남아 있었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짜내야 했습니다. 파업영상으로 다 소화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중간중간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완성을 못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고향인 구미로 돌아왔습니다. 쌍차 노동자들은 제가 구미로 내려오기 전 마지막 만난 사람들입니다. 깊게 만나지는 못했지만 공업도시, 노동자 도시인 구미로 오기 전에 제게 각별한 소명의식을 심어주신 분들입니다. 제가 2010년 구미시의원으로 당선되는 데에도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2010년 가을, 구미 KEC사태 당시 연대투쟁하러 내려오신 분들과 다시 뵙기도 했지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당시에도 여론의 지지를 얼마간 받았던 투쟁입니다. 노동자들의 편을 더 많이 든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죠. 우리 사회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그로 인한 구매력 저하로 돈이 돌지 않으니 이제 사람들도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양산으로는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못살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 사회가 깨달은 것입니다. 사태가 끝나고, 쌍차 노동자들 여럿이 세상을 떠나고, 파업의 댓가로 살인적인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시달리면서 그 깨달음은 더욱 뚜렷해져갔습니다. 법원으로부터 쌍차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정치는 아직도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제대로 조우하고 있지 못합니다.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도 시늉할 뿐입니다. 사실 이들은 '상하이차'라는 해외 투기자본이 쌍용자동차에서 '먹튀'를 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 자들입니다. 이번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새정련 후보 역시 정리해고 사태 당시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던 인물입니다. 결국,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이번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직접 후보를 내기로 결단합니다.
정치인 실망해 정치인 되려고요(김득중-조국 대담)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7466.html
김득중 후보 사무실에 걸린 현수막. 미남이시죠?
김득중 후보의 출마에 '진보'정당들은 즉각 화답합니다. 정의당과 통합진보당, 노동당이 지지를 선언했고 제가 속한 녹색당 역시 이 옆에 섰습니다. 출마 과정은 조금 급작스러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녹색당에서 지지 선언을 확정짓는 데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몇몇 당원들은 의견 수렴 없이 지지를 선언했다고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준도 불명확한 '절차'를 따지기보다 당의 강령과 정신에 김득중 지지가 위배되는지를 논해야 하며, 이와 같은 급작스러운 절차에 전국당이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사실은 저야말로 언론 보도로 소식을 접한 후 가장 먼저 당원들과 상의가 부족했음에 문제의식을 내비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승수 전국공동운영위원장으로부터 전국운영위원과 경기도당 그리고 평택 당원과 상의했노라는 설명을 듣고 더이상 문제제기하지 않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당의 결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어떤 당원들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정당"이 오히려 걱정스럽다며 당의 지도부(?)가 그 정도의 결정은 신속히 내릴 수 있어야 한다며 거들어주시기도 했지요.
고통받는 이들, 불의에 항거하는 이들의 정당인 녹색당이 정리해고자였던 김득중 후보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김득중 후보 역시 쌍차 해고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녹색당원들이 헌신적으로 활동중인)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 용산참사 피해자와의 연대에 나선 우리 시대의 사회운동가입니다. 또 저는 <한겨레21>기사 덕분에 추가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평택에서 있었던 큼직한 투쟁들(에바다 농아학교 사건,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강행)에 함께해왔던 사람이 김득중이었음을 말입니다.
아픔이 평택에게 슬픔이 김득중에게 [2014.07.21 제1020호]
[표지이야기] 에바다재단·대추리·쌍용차 투쟁을 거쳐온 땅, ‘살아남은’ 쌍용차
해고노동자이자 아픔의 ‘상주’ 김득중, 7·30 재보선 평택을 도전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477.html
저는 출마 소식을 듣자마자 평택으로 들어가 선거운동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큼 발걸음이 떼지지 않더군요. 구미시의원 선거 낙선 이후 스스로와 앞날을 돌봐야 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7월 26일 평택역앞 집중유세에 결합하는 것으로 선거운동 참여를 시작했습니다. 하승수 전국운영위원장과 김현 전국사무처장 등 당직자들이 다수 와 계셨습니다. 유세가 끝난 뒤에는 한 젊은 선거운동원과 함께 어느 상가를 돌면서 지지를 호소했고, 저녁이 되자 몇몇 당원들과 따로 술 한잔 한 다음 평택 녹색당원 노완호 씨의 안내로 늦은밤 선거캠프로 향했습니다.
그때 탄 택시기사 분은 평택 여론의 보수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득중 후보는 노동의제 뿐 아니라 혁신학교와 같은 교육정책에도 중점을 두었는데 대표적인 공약이 '고교평준화'였습니다. 평택과 인구가 비슷한 구미도 고교비평준화 지역인데 주민 여론은 찬성 쪽이 많은 편인지라 평택은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평택은 지금 고등학교들이 다들 괜찮고 명문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고교평준화 굳이 할 필요가 있냐"는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김 후보의 지지자임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득중 후보는 노동자색이 너무 강해." 그 택시가 개인택시인지 법인택시인지는 따로 살피지는 않았는데요. 역시나 한국사회는 '노동자'를 따로 존재하는 집단으로 여기고 '노동'을 특수한 가치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쌍용자동차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난 다음 회사 사정이 좋아지고 평택 지역경제가 좋아졌냐"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일년 이년만에 넘어설 수 있는 벽은 아니지요. 사실 노동자인 사람도 스스로 노동계급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저는 평택으로부터 구미의 자화상을 엿보았습니다. 성장만능, 개발지상의 슬로건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평택시의 구호에는 신(新)이 두 번 등장하더군요. '신성장', '신도시'. 그러나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마저 일터로 돌아가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어떤 개발과 성장도 더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리라는 예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출근길 시민들에 인사하는 김득중 후보
제가 늦은밤 선거본부로 향한 이유는 바로 거기서 잠을 자기 위함이었습니다. 화분으로 가려놓은 공간에 돛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보통은 선거운동원들이 중간에 쉬어가는 자리인데 그날 밤은 여기서 그대로 누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신세가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맡겨진 임무도 없었고 통솔해줄 리더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저와 함께 선본에서 잠든 또 하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올라온 노동자로 전화 홍보에서 발군의 활약을 하시던 분이셨는데요. 이분의 제안으로 후보 배우자를 수행하기로 합니다.
모 성당에서 뵌 후보 배우자는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계셨지만, 중간중간 이동중에 정신적으로 지친 기색을 내비쳤습니다. 배우자 분은 "다른 선거운동원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으쌰으쌰할 때가 힘들다"고 토로하시더군요. 이런... 저의 경험을 들려주면 조금 나아지시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두 번에 걸친 시의원 선거에서 적은 선거운동원으로 선거운동을 하던 후보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저랑 같이 선거운동을 하는 동료들도 다른 선거운동원들 앞에서 주눅이 든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상대쪽에서 우리를 보고 긴장을 하면 모를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려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배우자 분이 친정에 급히 다녀오셔야 할 사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려드렸더라도 큰 힘이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기세가 열등하다 싶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이 후보자 가족의 인지상정입니다.
배우자 수행이 끝나고 나서 일요일 오후 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치매인가;; 지지 연설을 이때 했던가요? 진보단일후보로서의 위상을 증명하기 위해 녹색당을 대표해 김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두 차례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평택역앞에서 이뤄졌는데요. 날이 너무 더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재보선을 여름에 하는 이런 악법을 남겨둔 걸로 보아 정치권은 문제가 많다. 김득중 후보가 국회에 들어가면 선거법을 꼭 바꿀 것이다." ^^
월요일(28일)부터는 김득중 후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활동 면적이 넓은 국회의원 선거라 그런지 후보자와 함께 차안에서 이동시간을 보내던 장면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저는 김득중 후보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연설을 할 때, 거리에 설 때 김득중 후보는 씩씩하고 울림이 크지만, 차안에서는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시중에 유포된 노동운동가에 대한 편견 어린 인상과도 많이 다름은 물론이고요.
아침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아가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노동자 후보 김득중을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이것은 선거 때마다 궁금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전세계에 주류 정당이 된 노동자 정당은 많으나 그 정당이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제1당이 되었는지는 언제나 의문부호가 달리거나 또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이날은 농민을 만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중복이었지요. 농민단체 활동가의 에스코트를 받아 경로당 몇 군데를 들렀습니다. 후보자 고향 부근이라서 주민들은 후보자의 가족에 대해 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농민단체 회원인 분이 몇 분 계셔서인지 그리 보수적인 말씀은 듣기 힘들었습니다. 한 농민은 노동자 후보 김득중에게 "농민과 노동자는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같지는 않겠지만 정말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노동자도 노동자지만 농민 좀 먼저 챙겨달라"거나 심지어는 "노동자가 농민을 대변할 수 있냐?"는 말을 하는 농민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분은 분명히 "농민과 노동자는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같은 것은 그뿐이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쌀에 관세를 붙여서 개방하는 농업 죽이기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예전 정부가 '상하이차'라는 투기자본이 쌍차의 기술을 유출하는 먹튀 행각을 벌일 때도 정부의 방관 내지 유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부하에서 사는 한 노동자와 농민은 같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잔5리 경로당에서는 아주 맛있게 삶은 돼지고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원래 따로 식사시간이 예정되어 있지만 한점두점 집어먹다 보니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도 김 후보는 점심을 먹자고 하시더군요. 김득중 후보는 선거기간 중 체중이 6kg 줄어드셨습니다. 다만 선거 막판에 먹성이 커지신 모양입니다. 후보 경험이 있는 제가 "선거 때 식사가 늘어나는 시기가 온다. 후보가 오히려 살이 찌는 사례도 있는데, 그게 이르면 살이 찌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드렸습니다. 참고로 저는 2010년 지방선거 때는 선거운동중에 살이 쪘고, 올해는 조금 빠졌습니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도 이날 두 차례 들렀습니다. 교대근무조에 맞춰서 방문한 것입니다. 퇴근하는 화성공장 노동자들은 버스터미널처럼 생긴 곳에서 회사 버스를 타게 되는데, 7번 이후 버스를 타는 분들이 평택에 사는 분들입니다. 화성공장에는 민주노총 활동가들도 함께 방문하여 노동자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표정은 대체로 알 듯 모를 듯한 것이었습니다.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저녁께에 찾은 오뚜기라면 쪽은 반응이 조금 더 좋았습니다.
29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 반, 기아차 화성공장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시간이 비어 함께 있던 수행원 두 분은 차에서 주무시고, 저는 후보자와 목욕탕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수행원들의 배려였지만, 한편으로는 뒷좌석에 제가 남아 있으면 앞자리 두 분이 의자를 젖히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다는 이치도 명백했습니다.ㅎㅎ
새벽 1시 반, 다시 찾은 기아차 화성공장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정장선 후보측이 와 있었습니다. 후보자는 정 후보보다 더 앞선 장소에서 노동자들과 악수를 나누었고 저는 정 후보의 뒷전에 있기로 했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며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노동자들이 꽤 많고 먼저 와서 악수를 청하는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정장선 후보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당시 국회의원이었고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노동자들은 그가 같은편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3선 의원으로서의 유명세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여러번 국회의원을 한 정치인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 질리기도 할 법한데도 지지세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다소 초조한 심정으로 정장선 후보측 바로 뒤에서 "김득중은 노동자입니다. 노동자는 김득중입니다"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정 후보측이 더 초조해 보였습니다. 일요일에도 정 후보측 선거운동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하루 차이지만 안색이 바뀌었습니다. 김득중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5%와 7%선을 돌파한 적이 있습니다. 정장선 후보와 새누리당 유의동 후보는 초접전을 벌이고 있었고요. 정 후보측이 더 초조해졌다는 건 김득중 후보 지지가 더 올랐다는 뜻입니다. 우리쪽 운동원들도 10%를 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15% 넘으면 다음에 또 선거하자고 할 텐데"라고 짐짓 걱정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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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마... 주변 사람들 다 연락해놨어."
마지막날인 29일(화). 아침 선거운동 장소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이었습니다. 생산라인을 이미 돈 적이 있는 후보자가 정문에서 동료들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후문쪽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소식지를 나눠주며 쌍차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공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생존에 안도하는 걸 넘어서 잘려나간 동료를 지지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빗속 바쁜 출퇴근길에서도 격려해주시는 숱한 분들 속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이날 아침을 들기 위해 들어간 식당은 제가 취재하던 중 한 차례 식사를 한 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 그로부터 중도 하차하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가며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순간, 그리고 그후 흘러온 5년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지났습니다.
오전 10시에는 선본에서 두 분의 고등학생을 맞았습니다. 전북의 한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로 녹색당 전국사무처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상원 평택평화센터 소장님과 넷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선거운동을 돕고 싶어하는 이 학생들이 맡은 임무는 정치후원금을 보낸 분들에게 연말정산용으로 드릴 영수증을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재미없어 보이는 실무가 바로 선거운동을 떠받친다고 역설(!)했는데, 그런 설명 없어도 학생들은 나름대로 재미있게 영수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과 점심시간을 보내고 한동안 선본 휴게공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4시간 잠을 자는 일정을 겨우 이틀만 수행했을 뿐인데 매우 깊이 잠든 것 같았습니다. 저녁에는 평택 시내 집중유세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한 차례 더 지원연설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사극을 보면 왕이나 재상인 드라마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백성이, 불의에 항거하는 백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는 '정도전'을 소재로 홍보를 하더군요. 하지만 역사는 정도전 같은 사람들이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바꾸고 만들고 지켜왔습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의 한 사람, 300분의 1이 아니라, 우리 중의 한 사람이었고 우리 중의 한 사람일, 노동자 서민의 대표 김득중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무더웠던 나날도 어둠이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김득중송을 불렀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cfykk7m_6o
아무도 책임을 다하지 않아
세상이 휘청거리고 슬픔이 가득한 때에
평택에서만큼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김득중
노인들의 걱정과 부모들의 고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고
서민들의 한숨과 서민들의 눈물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 김득중
분노와 절규, 고통과 눈물 속에 직장에서 잘려나간 사람들... 그들이 자신의 삶터를 빼앗기는, 또다른 모습으로 짓밟히는 다른 사람들과 손잡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잘난 사람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신념으로 김득중 후보를 내세워왔습니다. 아직도 숱한 국민들은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에 줄 서듯 투표를 하고 있고, 자신의 논리를 갖지 못한 채 누가 싫어서 다른 누구에게 투표하는 보람 없는 정치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정치,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 없는 사람들의 정치는 그 속에서 몸을 뻗지 못하고 그로 인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김득중송이 나오는 가운데 저는 기호 1, 2번이 만든 좁다란 골목에 서 있는 우리의 처지를 느꼈고, 그러면서도 저 멀리 틈새로 보이는 넓은 광장이 보였습니다. 눈물이 흘러 내려왔습니다.
선거운동을 마무리하는 뒷풀이를 가진 뒤 이번에는 따로 마련되어 있던 숙소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노동당 소속의 나경채 전 관악구의원과 함께였습니다. 같은 전직 시의원에 같은 낙선자였습니다. 서로 나눌 말이 많았지만 각자 서울과 구미로 가야 했습니다.
평택역에서 수행팀장 역할을 하시던 윤충열 님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마침 식사할 장소를 찾던 중이었는데, 윤 동지께서 평택 시내의 유명 식당인 '파주옥'으로 저를 데려가주셔서 같이 꼬리곰탕을 시켰습니다. 개표 결과를 선본에서 지켜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구미에서 할 일이 있어 먼저 내려왔습니다.
김득중 후보의 득표율은 5.6%. 여론조사 지지율보다 더 떨어져 있어서 약간 실망했습니다. 제가 짧게나마 지켜본 후보자로서의 김득중은 매우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선거운동 와중에 후보자는 동료가 많든 적든 외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고 조바심이나 짜증에 시달리는 것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후보자는 조급하지 않았고 시민들을 만나는 자세도 열정적이면서도 편안했습니다. 처음 나서는 후보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게 바로 민주노조운동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보자가 안고 있는 당위도 당위지만, 그는 매력적인 후보였습니다. 평택 토박이이자 평택의 노동자로 살아왔기에 인맥도 얇은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기대를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날씨는 날씨대로 더웠고, 새누리당을 떨어트리는 게 먼저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김득중에 끌리다가도 기호 2번으로 기울어졌을 테고, 거대 정당 후보도 아니고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닌 후보가 못미더웠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노동자 후보였지만 그를 대충이라도 설명해줄 정당명칭도 없이 투표용지에 달랑 남은 석자 '무소속'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김득중 후보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었다는 논평은 없는 듯하지만, 후보에게 실망스러운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선거였습니다.
예전에 저의 어떤 페이스북 친구께서는 안철수 현상을 지켜보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고 그것이 안철수의 인기 비결"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저는 그 진단을 오늘에 이르러 아주 확실하게 기각합니다. 안철수는 이미 유명 인사였고, 유명하지 않은 후보에 대해서는 그런 이치는 절대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면 갈수록 기호 1, 2번의 정치에 빨려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진보정당이 분열했기 때문에 1, 2번이 득을 본다? 이번 재보선 결과를 보면 진보정당이 하나가 된다 한들 김득중 후보가 얻은 득표율을 넘어서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무엇 더하기 무엇식으로 조립할 생각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그 새로운 틀을 짜낼 때만이 김득중과 같은 후보를 또 배출해내고 선전할 수 있도록 하고 당선시킬 수 있다고. 기존의 진보정당들은 내부의 오류를 뛰어넘지 못했고 그 오류가 바로 진보의 분열 또는 분화를 낳았습니다. 그 틀을 그대로 둔 채 통합에 목을 맬 때, 우리는 김득중 후보를 무소속으로 출마시켜 고생하게 한 것보다 더 암담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 거라고 단언합니다.
통합이든 독자든, 진보든 녹색이든, 바라보는 목표가 바람직해야 합니다. 우선은 복잡한 계산 없이 피해대중의 분노와 의지를 직접적으로 직설적으로 분출해야 합니다. 김득중 후보와 함께한 평택의 나흘동안, 저는 또다른 나날을 새로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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