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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 진보의 진보

문제는 3당합당이 아닙니다 - 영남 1세대 노동자의 산업화 향수

영남 1세대 노동자의 산업화 향수.

영남 지역주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지목되는 원인이 '3당합당'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논의가 빈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호남 농촌의 젊은이들이 외지로 떠나 취직한 것과 달리, 과거 영남 농촌의 젊은이들이 멀지 않은 도시에 취직한 것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의 고향이 영남이라 동향이라고 지지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고향 방면에 공단을 지어 가까운 곳에 자리를 틀었으며 집 떠난 고생이 줄었다는 겁니다. 영남 출신이지만 타지 생활을 했던 전태일 열사와 대조됩니다. 여기에 영남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다 보니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고 폐쇄적이게 되는 특성이 따라 붙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일어난 민주노조운동은 진보정치의... 기반이 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박정희시대 최대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저임금 상태를 타개하면서 불만이 풀린 노동자들을 체제내화하는 결과도 낳았습니다. 또 노동운동 스스로가 임금 문제 이상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책임도 있었습니다.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입니다. 노동운동이 오히려 박정희의 역사적 기반을 다져준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IMF를 만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해고된 오늘은 어렵지 않게 취직해 그럭저럭 먹고 살았던 과거와 대비됩니다. 잊혀져갔던 박정희가 은인으로 복귀되고, 더 잘 살게 해주리라 기대한 민주화시대는 고용불안을 야기했습니다. 회사 나와서 장사해도 먹고 살기 힘듭니다 이날 이태껏.

 

결과론적으로 저임금 상태가 좀 더 늦게 끝났거나, 혹은 IMF가 좀 더 빨리 터졌거나 했다면 박정희 향수는 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일 강력하게 박정희를 청산할 기회는 부마항쟁을 계기로 박정희가 퇴진하는 경우였겠지요. (하지만 그러다 유혈사태가 났다면 독재타도와는 별개로 우리 역사는 더욱 끔찍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을 광주시민들이 껴안고 산화해버린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석이 실패한 이유는 한사람 한사람의 삶과 역사를 잘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묶어서 재단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잘못된 언론과 교육으로 굴절되었다고만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개선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청년세대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학력이라거나 좋은 언론을 접한다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제2, 제3세대 노동자로서 만성적인 저성장시대에 '비정규' 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앞세대가 가진 산업화 향수와 그에 얽힌 박정희 향수로부터는 물론 독재에 이어 시민들을 농락한 신자유주의에 -몇년간은 굴복 또는 추종하더라도- 영영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