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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모심

'어르신 기본소득'이 필요한 현실 (레디앙)

복지 선별기준, 단순하고 간단해야

[진보정치 현장] '어르신 기본소득'이 필요한 현실



 

By / 2012년 8월 6일, 9:52 AM

학교 다니느라 서울 살 적 일이다. 자취집 문을 나서는데 한 할머니가 전봇대에 기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어쩌다 나오시긴 했지만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못 떼고 계셨다.

집이 어디냐고 여쭸더니 집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곳을 가리켰다. 바로 뒤편, 세탁소와 구멍가게의 틈새였다. 거기가 창고가 아니라 집이란 말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3,4평 남짓한 공간이 나왔다. 반은 비를 피할 수 있는 마루고 반은 하늘이 지붕인 빈 공간이었다.

 

충격을 받아서, 여기서 어떻게, 왜 사시는지 여쭙지도 못하고 안만 몇차례 두리번거리다 돌아섰다. 며칠이 지나 그곳엔 지붕이 씌워지긴 했으나, 다시는 그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무렵은 한창 민주노동당 당원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그날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가 무엇 때문에 진보정치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두고두고 돌아보게 했다.

 

나는 전경으로 군 복무를 했고, 시골 치안현장에 한동안 나가 있었다. 부모가 죽기만을 기다리는지 부모를 전혀 돌보지 않는 자식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영화 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그곳에서 2004년 총선을 겪었고, 탄핵 후폭풍에 이어 정동영씨의 ‘노인 폄하 발언’도 지켜봤다(그 발언이 진짜 노인 폄하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정동영씨의 발언을 욕하고 비웃는 중년 남성들을 오히려 경멸했다. 그들부터가 ‘노친네’ ‘노인네’라는 어휘부터 시작해서 노인 폄하가 버릇처럼 붙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제대 후 진보정당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조직된 노동자보다는 치안현장에서 만난 빈곤 어르신 같은 분들의 영향이 더 컸다.

 

한국에서 노인 빈곤 문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폐품 수집 노인의 모습

 

지방선거에 나서면서도 노동자를 대변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사정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대변하겠다는 포부가 더 강했다. 청·장년 노동자에게는 노동조합 같은 조직적 경로도 있고 그게 없더라도 인터넷 같은 개인적 수단이 있었지만, 빈곤 어르신을 포함한 서발턴은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공직 정치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몫이 있다.

 

창의적인 노인 복지정책을 내놓았던 건 아니지만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을 허투루하지 않았다. 세대적 특성에 따른 일정한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부모-자녀뻘 되는 사람들은 갈등하기 쉽다. 하지만 조부모-손자뻘은 다르고, 실제로 그랬다. 득표로 연결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나름대로 어르신 사이에서의 호감도가 높았다. 우호의 대상이 내가 가진 내용보다는 어렴풋한 이미지여서 민망하긴 하나, 의정활동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재작년 7월 의정활동을 시작하고 동네에 사무실을 내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독거 어르신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난감한 적도 있었다. 지원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분야가 아닌 탓에 사적인 기부를 요청받을 때가 그랬다. 끝나고 원룸을 나설 때 “어쨌든 고맙다. 영세민들이 기대가 크다”는 말이 귓전에 울리고, 자전거에 올라타는 등줄기에 곤혹스러운 땀이 흘렀다.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공직자 기부행위 금지 때문에 불가능했다.

 

별 일 아니었지만 소중한 추억이 된 사건도 있다. 외지에서 구미로 돌아온 한 할머니가 화가 나셨다. 기초생활보장 급여가 적게 들어와 관공서로 전화를 했더니 “그럼 다시 이사 가시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택시기사가 “김수민 의원에게 연락해보자”고 해서 결국 내 귀로 들어온 사연이다. 미지급된 급여는 당연히 다음달에 할머니 통장으로 들어왔다. 또 그때 빛났던 사람은 담당자에게 전화 한 통 걸어 시정을 요구한 내가 아니라, 할머니를 나에게 연결시켜준 그 택시기사였다. 그분은 평소에도 독거어르신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셨단다. 며칠이 지나 할머니는 나를 자신이 거주하는 원룸으로 부르셨다. 민원이 있는 줄 알고 갔던 나는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버섯으로 담근 술 한병을 내게 건네신 것이다.

 

그 밖에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과 쉬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거쳐 왔다.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애매한 경우’다. 이 애매함은 원래 애매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이 애매함은 이른바 ‘선별적 복지’가 만든 것이다. P 할머니, S 아주머니의 사연이다.

 

선별적 복지가 만들어낸 애매한 사연들

 

P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의 안내로 나를 찾아오신 분이다. 이북이 고향으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셨고 한동안 부산에 사셨단다. 부군이 지역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쪽에도 인맥이 있다고 한다. 집안도 한때 넉넉했지만 부군이 밖에서 활동하느라 돈을 많이 쓰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그는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유복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들렀을 때도 복지담당 공무원은 “겉으로 보면 멋쟁이 할머니신데, 저런 분이 대상자로 선정되는 걸 못봤다”고 내게 귀띔했다. 하지만 자녀 넷 모두와 연락이 끊기면서 생활이 힘들어졌다는 게 P 할머니의 주장이었다.

 

부양의무자 기준에 의해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급권을 박탈당하는 사례들이 흘러 넘치므로 나 역시 P 할머니가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에 낙관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내역을 조회한 결과 자녀들과 연락하지 않았다는 게 입증되면서 P 할머니는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반전이 발생하고 말았다. 해외에 나가 있는 줄 알았던 자녀들 중 한명이 모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답답해진 할머니는 자식의 연락처와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사생활 정보라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다시 통장 사본을 제출해 그 사이 자녀로부터 받은 생계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다.

 

S 아주머니는 연령은 50대 후반이지만 빈곤 노인보다 나을 게 없는 처지다. 아니 더 어렵다. 남편은 공공근로에 종사하고 고등학교를 가지 못한 딸은 어느새 20대가 되었다. 장애인인 아들이 타지에 나가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일 정도다. 게다가 처음 뵈었을 당시에는 동네 아이 몇몇에게 돌을 맞거나 집주인에게 온갖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처음 며칠 나는 잠을 설쳤다. 이 한사람의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것은 무능이고 지방의원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다른 이웃한테도 욕을 먹는 통에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듯했고, 돌 던지는 동네 아이는 학교에 전화를 해 해결했다. 그냥 ‘이웃 주민’이라고만 밝히고, “범인을 색출하기보다 재발이 안 되게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다음에 당면한 건 틀니였다. 이분은 이가 거의 없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였지만 연령이 미달해 지원받지 못했다. 곱씹어보니 이상하다. 나이가 50대에 불과한데도 틀니가 필요하고 또 틀니를 해넣을 비용이 없다면 형편이 얼마나 힘들다는 건가?

 

조건은 한가지면 충분하다. 어르신이라면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틀니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연령을 떠나 빈곤층이라면 틀니 같은 건 지원받을 수 있어야 한다. 보건소에 이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보건소측도 “기타 보건소장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만65세 이하에게도 틀니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화답했고, 마침내 얼마간의 예산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한때 S 아주머니가 “잇몸 상태가 너무 나빠 틀니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나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6월쯤 내가 없던 사무실에 찾아오셔서 드디어 틀니를 했다며 웃으셨다고 한다. 줄거리를 아는 내 주변 사람들은 “쾌거”라고도 한다. 인류와 지구를 구한다고 했지만 사람 한사람 살리지 못한 내 20대를 돌아보면, 내 개인적으로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인 건 맞다. 하지만 한발짝 물러서서 보자. 이가 없어 괴로운 사람에게 틀니를 겨우 해준 것이 쾌거인가?

 

선별의 기준은 단순하고 단일해야

 

‘선별적 복지/보편적 복지’라는 구분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보편적 복지정책도 알고 보면 선별의 결과다. 학교무상급식은 학생이라는 기준으로 선별된 시민에게 적용된다. 기본소득? 인간에게만 지급되므로 동물 입장에서는 이것도 선별적 복지다. 단 선별 기준의 가짓수에 따라 복지정책이 분류될 수 있을 뿐이다.

기준이 늘어날수록 선정 심사나 부적격자를 가려내 탈락시키는 데 소모되는 행정력은 커진다. 사각지대가 발생하면 거기에 또 신경과 행정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공무원은 힘에 부치고, 수급자는 그 이상으로 힘들다.

 

고로 나는 빈곤의 현장에서 깊이 고민한 사람이 내릴 결론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선별적 복지를 더 섬세하게 설계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상 선정의 기준은 한가지로 수렴되는 게 좋다.

하루는 P 할머니와 길을 걷다 이렇게 말했다. “그냥 연세가 어느 정도 되면 무조건 수급대상이 되는 제도가 낫지 않을까요?” “잘사는 사람도 다 주고? 그게 되나요?” 상상 이상의 구상이었나 보다.

 

선별적 복지의 난점으로 곤경을 겪는 P 할머니에게도. 그러나 사정이 어려운데도 그 사정을 설명하고 강변해야 하는 P 할머니 같은 분들을 위한 제도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지금으로서 나는 어르신 기본소득밖에는 주장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