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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Columnist

장 조레스, 그의 삶

오늘 7월 31일은 프랑스의 정치인, 장 조레스의 기일입니다.

2009년 겨울에 썼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부당하게 고통 받는 '한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 그의 삶>
 

"사회주의에 충실했기 때문에 암살당한 이의 권위를 사회주의에서 독점하려는 이 정치조작은 철저한 사회주의 배신행위."


한 프랑스 공산당 의원의 발언이다. '사회주의에서 독점'할 때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사회민주주의'일 터이다. 이에 관해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지도자, 레옹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것이다. 그가 우리의 당이었고 우리의 사상이었고 우리의 교리였다."


양측의 발언은 장 조레스(1859~1914)를 둘러싼 것이다.(이 저서의 16쪽 참조) 사회주의 역사에서 사회당 계열과 공산당 계열이 다퉈가면서 함께 추모하는 인물은 흔치 않다. 한국의 여운형도 그러한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 프랑스 사회주의의 지도자, 장 조레스(1859~1914). 팡테옹에 있는 그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유명하다. '인민의 호민관'.
장 조레스

장 조레스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는 낯설다. NL(민족해방)이나 PD(민중민주)와 같은 혁명주의에 가려진 탓일까. 10여년전 학위논문으로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85~1914)>을 제출한 노서경 박사가 외로이 분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지난해 조레스의 글을 모은 <사회주의와 자유 외>(책세상)를 번역했고, 이어서 올해 <장 조레스 그의 삶>(당대)을 옮겼다. 원저자는 언론인이자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 <나폴레옹>, <드골> 등을 저술하기도 했던 막스 갈로.

공화파 엘리트에서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성장하다

장 조레스는 노동자 파업과 의회정치를 통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를 펼쳤다. 이러한 입장은 초창기에는 프랑스 사회주의정치세력의 주요노선으로 등극하지 못했다. 쥘 게드 등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미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공상적 사회주의,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의 전통도 있었다. 한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행동으로 세상을 뒤집는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이 번졌다. 조레스는 이러한 프랑스 사회주의의 역사에 지성적 사회주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불어넣은 장본인이다.

갈로의 본 저작은 조레스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고 그의 성장기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그가 지성인으로 자라난 과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소년기의 조레스는 반항아가 아니라 모범생이었다. 성적이 뛰어나 장학생으로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교육 기회의 확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해군 제독인 친척 어른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분야에 관심이 깊었고, 앙리 베르그송과 같은 쟁쟁한 동창들 사이에서 뛰어난 연설과 토론실력을 선보였다. 그는 엘리트이자 남부 지역의 촌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노동계급과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파가 아닌 공화파에서 정치역정을 시작했던 때가 1884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조레스의 미시적인 개인사에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여성관, 연애관, 가족관에서만큼은(시골에서 태어나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이로서는 어쩌면 당연히) 점잖고 관습적이었다. 또 이 지적인 인물이 결투에 두 차례 연루되었던 것도 재미있다. 결투를 비롯한 당대 프랑스의 풍습를 엿볼 수 있는 참고문헌으로는 에드워드 베렌슨의 <카요 부인의 재판>(신성림 역, 동녘)이 있다. <장 조레스 그의 삶>의 후반부에 카요 부인의 남편 조제프 카요와 장 조레스가 맺는 연대 겸 긴장관계가 서술되어 있는 만큼, 두 책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처음 들어간 의회에서의 노력과 번민, 기득권세력의 반격에 밀려 패배한 두 번째 선거,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에 연대했다가 광부들의 추천으로 보궐선거 당선, 그리고 현장 가담과 의정활동의 결합...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바로 조레스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낙선 뒤 파리고등사범에서 공부를 계속해며 연하의 스승 뤼시앙 에르를 만나 사회주의 이념을 익히고 그것을 프랑스적으로 소화하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인생 행로는 젊어서는 진보적인 게 자연스럽고 늙어서는 보수적인 게 당연하다는 통념에 저항한다. 인본주의와 공화주의, 개인주의를 지향한 그는, 약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개인들의 민주주의 다수혁명

조레스는 끈질긴 보수파와 유약한 중도파에 대응해 좌파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통합의 전제가 더 깊고도 새로운 원칙을 향한 혁신임을 독자들은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의 주류로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던 게드파의 비난과 조롱에도 스스로의 개혁주의를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이웃나라 독일의 동지들인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룩셈부르크 등에게 비판받았다. 조레스는 때에 따라 유연하게 중도 공화파와의 연합전술을 폈지만 그것은 철저히 공화국 수호라는 당위에 따라 이뤄졌으며 결코 빈자를 위한 강령을 꺾지 않았다. 

지난해 번역 출간된 <사회주의와 자유 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광대한 운동으로부터 부상한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방법론' 중에서)

사회주의는 논리적이고 완전한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확장함으로써 혁명적 개인주의로 이어간다.('사회주의와 자유' 중에서)

  
▲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지음, 노서경 옮김.
ⓒ 당대
장 조레스

조레스의는 개인들이 민주주의를 토대로 자유롭게 구성한 '크나큰 다수'를 계급독재로 환원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한 인간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가 부르조아일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개인주의자였다.

1914년 세상을 떠난 조레스는 파시즘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는 그러나 파시즘 이전의 반파시즘 지성인이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당대를 삼켜나가던 반유대주의에 반대했다. 게드를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조아 내부의 사건'으로 치부하던 드레퓌스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군부재판의 비밀성부터 비판하며 신중히 접근하던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반유대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게 된다.


"매순간 조레스의 선택은 민주주의, 개인과 집단의 자유, 그가 공화국이라고 부른 것 편이었다."(<장 조레스 그의 삶>, 779쪽)

조레스가 '뉴라이트'가 되지 않은 까닭은?

슬슬 전운이 감돌던 시기 조레스는 반전평화론으로 인해 '친독일파'로 찍혀 애국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 뤼시앙 에르, 레옹 블룸 등과 함께 개혁주의 노선을 프랑스 사회주의의 주류로 올려놓고 나서도, 노동계급과 농민을 비롯한 대중의 칭송을 받고도, 고립과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이 책의 종반부는 전쟁을 막고자 동분서주하는 조레스의 마지막 나날을 담고 있다. 조레스는 프랑스혁명의 전통을 중시하며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자에게도 조국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애국자였다. 다만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고, 자유와 평등의 한 수단이었기에, 그의 애국심은 애국주의와 부닥친다. 그리하여 1914년 7월,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쳐온다. 

이 책에는 한국인 독자로서 특별히 곱씹을 만한 부분이 있다. 밀랑, 비비아니, 브리앙 등 예전 조레스의 동지들은 중도파가 주도하는 내각에 들어가면서 훼절하고 만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게드조차 조레스 사후 전쟁이 터졌을 적 비상내각에 입각했고,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였던 에르베는 조레스의 죽음을 '국가 방어'의 소재로 쓰면서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돌변했다. 극좌에서 극우로 전향한 오늘날 한국의 어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특히 '뉴라이트'가 오버랩된다.

그렇다면, 조레스는 왜 여러 방향에서 숱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발길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자신의 목숨을 걸며 공화국의 양심, 사회주의의 표상으로 남았는가? 아마 이 질문에 관한 답이 이 책에서 읽어낼 가장 커다란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