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민과 나눈 중앙정치 얘기
[진보정치 현장] 범야권 성향 지지자들과의 대화
요즘 폐기물관리조례 개정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무지하게 바쁘다. 물론 마음 쪽이 더 바쁘다. 그래서 글을 써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정종권 편집장이 요청한 원고 마감 시기를 넘겼다.
원래 시험이 코앞에 다가온 학생일수록 만화책에 더 끌리는 법. 폐기물관리조례 개정을 비롯한 지역정치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나가고, 이번엔 ‘지역에서 주민들과 나눈 중앙정치(대선) 이야기’를 올린다.
나는 2009년 봄에 당적이 없어졌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제도권 정치인이 되었다. 정당정치 참여가 중단되고, 그해 초 학교를 졸업했으니 학생운동도 못하고, 취업을 못해서 노동운동으로 이어갈 수도 없었다.
구직자도 참여하는 청년유니온이 생긴 건 나중의 일이다. 그러다 풀뿌리운동을 하기로 결심했고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것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유도 그야말로 ‘그때 당적이 없어서’일 뿐이었다.
무소속 출마는 그다지 득표에 더 유리할 게 없었다. 나의 득표율은 당시 우리 지역구의 광역의원 정당명부 투표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사회당이 거둔 득표율의 총합 가운데 60% 수준에 불과했다.
나머지 표들의 대다수는 공천탈락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한 액면상의 무소속 후보자가 가져간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그분도 나와 동반당선되었다).
야권 후보가 나밖에 없었음에도 야권표를 결집시키는 데 작지 않게 실패했고, 그러고도 당선은 됐던 셈이다. 아마 진보신당 당원이 ‘야권단일후보’ 타이틀을 걸고 우리 지역구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더라도 나보다 득표가 많았을 공산이 있다.
그러나저러나 나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절대 다수는 야권 지지자다. 그들 사이에도 정당 지지가 엇갈리기는 하겠으나 새누리당의 지역내 강세에 대한 역작용으로 야권 지지 유권자들은 분화보다는 단결 성향이 더 강하다
이는 야권 지지자들 전반에 해당하는 전국적 상황이기도 하다. 야권 각 정당의 정책차에 견주면 그 지지자들간의 간극은 아직 좁다고 볼 수 있다. 지방정치 분야로 내려오면 더욱 그렇다.
학교무상급식, 공공부문 정규직화, 주민참여예산제, 도시농업, 사회적경제 육성 등의 과제에서 어떤 민주당 지자체 단체장들은 진보정당 단체장들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 투표했거나 오늘날 나를 지지하시는 분들 가운데 내 소속정당인 녹색당의 지지자는 극소수다.
그래서 바로, 중앙정치를 논할 때 ‘지지층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40대 아저씨A. 지역 토박이이며 행정에 대해서도 다른 주민들보다는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새누리당 지지자 틈바구니에서 오래 전부터 ‘야당 성향’으로 살아왔겠지만, 이분 목소리가 커서 주눅들거나 기가 꺾인 적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우연히 한번 당구장에서 마주쳤는데, 큐대보다 목청이 더 강했다. 작년에 빌려간 리영희 선생 저서를 며칠 전에야(며칠 전이었지만 어쨌든) 돌려주셨다.
토착민으로서 지역 사정에 밝으면서 동시에 개혁 성향을 띠는 이런 분은 나 같은 지방의원에게 상당히 큰 도움을 주신다.
A가 며칠 전 물어왔다. “녹색당은 어찌 되가나? 또 창당하나?” “그럼요, 10월에 재창당합니다.” 그러니 ‘이 친구 고집은 안 꺾는구만’이라는 표정으로 웃으신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제시하신 말씀, “음, 김의원이 조금 더 범민주세력의 단결 쪽에 무게를 실어주시면 좋겠는데…” 이분은 문재인빠인데 대선에서는 야권단일후보를 미실 거란다.
30대 노동자B. 대기업에 다니고 있으며 봉사 등 각종 활동에 열정적인 ‘보기 드문 젊은이’다.
별다른 목적 없이 나를 두고 “동질감을 느껴서” 사무실에 찾아오셨던 게 첫 만남이었다. 원래 지방자치에 관심이 크셨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근래 ‘참여예산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고 나서 ‘뭐라도 더 해야겠다’고 결심한 눈치다. 역시 문재인 지지자이며, 원래는 유빠였단다. “안철수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누가 되든 야권단일후보를 찍겠단다.
“녹색당이 잘되기를 빌고 다당제 정착에도 동의해요. 그런데 그전에 최악부터 막아야죠. 박근혜는 정말 아니잖아요. 김의원도 야권단일후보를 찍어야죠.”
예전에도 몇차례 들은 말인데 얼마 전 또 들었다. 나 역시 ‘독자적 변혁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 했던 레파토리를 되풀이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찍어줄 수도 있는데, 찍어줄 만한 수준으로 그를 견인하려면, 새누리당 싫다고 그냥 찍어주면 안 되지요. 밀당을 해야죠, 밀당을. 중간층에 속하는 상당한 수의 유권자들한테도 그런 식으로 설득하면 안 됩니다. 신나서 찍게 만들어야지 ‘박근혜 싫으니 누구 찍어라’ 이러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내게 더 과감한 결정을 요구하는 분이 있다. 게다가 더욱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
50대 아저씨C. 예전에 노동운동과 진보정당활동을 하셨던 분이다. 오래 식당을 운영하시다 건설현장을 거쳐 최근 한 기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또 한편,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고 녹색당에 가입했다. 순전히 나 때문에 가입하신 건 아닌지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 이상으로 고맙기도 하다.
요즘 다들 시즌이 시즌인가. C도 A, B와 비슷한 시기에 술 한잔을 제의하셨다. “김의원, 녹색당과 안철수의 연대 가능성은 없나?” “정책연대가 되더라도 세력연대가 되겠습니까. 녹색당은 시작단계인데요.”
그는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의원, 안철수 진영에 합류하는 걸 타진해보게.” 가볍게 흘리는 조언인 것 같아 정색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에이 제가 듣보잡 지방정치인인데 거기서 알아주기나 하겠어요?”
하지만 그는 작심한 것 같았다. “구미에서 노동자 의원, 노동자 시장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게 어디 되던가. 노동운동권이 자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나. 내가 보기에 이번이 기회고, 안원장이랑 자네랑 이미지도 맞네.”
“‘경제사범 반쯤 죽여놔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안철수 진짜 성격이면 저하고는 맞습니다만, 제가 대통령후보 당선시켜 청와대 들어갈 것도 아니고 나이도 아직 젊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가 약진했듯 세계사적으로 지금은 더 변혁적인 노선을 요구되고 있다”는 둥의 거창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오해 없기를. C선배는 비정규직이 된 작금의 처지에서 노동운동 복귀를 노리는 중이다. 나이 들어 진보색이 흐릿해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노동자정치의 패색(또는 녹색정치의 여림)에 대한 절망과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런 분조차 내게 그런 요구를 할 정도로 ‘일단 당선가능성 높은 인물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이라는 격량이 휘몰아치고 있는 현실이다.
나와 녹색당 등에 포진한 동지들이 걷는 ‘독자노선’, 그리고 지역정치를 계기로 내게 지지를 보내는 다양한 정당지지 성향의 시민들.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장기과제로 남을 것이다. 그런 동시에 그 과제를 장기적으로 사유하고 풀어갈 기회를 앗아갈 가능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안개 속에서도 한걸음 더 내딛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앞에서 예로 든 주민들은 모두 남성이다.
새누리당을 싫어하는 여성들은 나를 만날 때 이 당이 어떻고 저 대선후보는 어떻다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무상급식 실현 방안을 묻고, 현정부 방식의 무상보육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스쿨존의 허술함을 문제 삼으며, 도시농업조례 발의 예고에 손뼉친다.
구미의 제1야당은 30대 여성, 영유아와 어린이의 엄마들이다! 지방정치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하며, 우선 이 ‘제1야당’의 명실상부한 대표자가 되려 노력한다.
그나저나, 대선은, 어.떡.하.지? 이번이 나로서는 세 번째 대선 투표인데, 투표가 석 달 앞인데도 방침을 못 정한 이 전무한 상황이 납득이 안 된다, 납득이.
추신 : 내가 사무실에 없을 적 어떤 주민이 찾아오셔서 보조활동가에게 전하고 간 내용이란다. 그분은 위에 나온 인물들보다 나이가 많고, 농민운동과 진보정당 활동을 경력이 있단다.
“김의원은 민주당엔 절대 가면 안 된다. 가서 뭘 얼마나 하겠는가? 통합진보당 정도 규모의 당에 가면 좀 더 수월하긴 할 것이다. 녹색당보다는 훨씬.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김의원은 녹색당을 해야만 한다. 자기 손으로 새로 당을 만드는 게 김의원이 따라야 할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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