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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먼저다

단순노동, 숙련노동, 프리랜서, 농업 - 노동절 단상

후보로서는 처음이지만 이래저래 선거 경험이 있다. 언젠가는 상황실 임무에 더해, 홍보, 흑색선전 대처, 정세분석까지 떠맡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선거가 혼탁 양상으로 가고 조직들의 끌어당기기가 심각해지면서 부서별 스트레스도 올라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우리 운동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작업이 있다. 배정받은 기호가 적힌 스티커를 공보물에 붙이는 작업이었다. "아 이제 좀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 같네."

인간의 머리결이나 머리숱은 생각에 영향 받는다. 집안에 대머리가 없음에도 나는 종종 탈모를 겪고는 했는데, 그건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다. 성찰이 깊은 삶은 훌륭하지만 생각이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니다. 성직자나 수행자들이 명상을 하는 이유는 생각에 빠질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다. 나는 단순노동을 곧잘 수련이나 명상에 비유하고는 한다. 또 이것은 고도의 수련이 아니라, 낮은 수준으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일이다. 또 점차 놀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노동절을 맞아 오늘 구글 검색사이트에 걸린 그림입니다.



산업화와 함께 분업체계가 이뤄지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것이 근현대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예나 농노의 신분으로 주인에 얽매여서 이뤄지던 '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도 엄연한 인류의 역사발전이다. 그러나 단순노동, 특히 육체노동을 특정한 사람이 떠맡으면서, 거꾸로 말해 전문노동자, 숙련노동자가 따로 존재하면서 차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삶과 세계를 깊이 생각한 사람이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고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자리에 앉는 게 당연하다는 원리를 믿지 않는다. 빈부의 격차와 삶의 조건차는 현대사회에서도 세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발생하는 산업, 경영, 노동의 여러 문제들은, 단순노동자 따로, 숙련 및 전문노동자 따로, 육체노동자 따로, 정신노동자 따로 존재하는 현실을 타개해야 비로소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는 산업화 그리고 역대 모든 정부의 농업억압정책으로 빠르게 농촌이 쪼그라들고 농민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걸 그냥 인정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철저히 무게를 둬야 한다는 억지도 있다. 실제로 정부는, 민주정부조차도 부농과 대형경영에 의지하는 농업정책을 폈다. 하지만 농업이 초국적 대자본의 손이나 소수 재벌의 손에 들어갈 때, 식량의 안전과 물가 문제는 언제든 뒤흔들릴 수 있다. 그때 가서 우리는 뒤늦게 '농자천하지대본'을 읊조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소농 육성인데, 농민의 수를 늘리는 일은 역시 만만치 않다. 다만 '우리 모두가 농민인' 그런 사회를 모색한다면 답은 있다. 먼훗날 전업 농민이 거의 없는 실정이 되어도, 자기 먹거리를 자기가 생산하고, 부족한 부분은 생활협동조합과 물물교환, 대한화폐로 메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진일보한 현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첫걸음 삼아, 지방자치정책으로 공유지 주말텃밭 만들기를 고안한 바 있다.

기계화의 첫 단계에서 인류는 이미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을 겪은 바 있다. 실업란이 가중되는 와중에 사무자동화도 악셀레이터를 밟고 있다. 이쯤되면 구조적으로 대량 실업을 피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경제는 경제 그 자체, 특히 기업과 시장의 논리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치 원리와 사회 원리도 경제를 움직인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선 체제도 그것의 결과다. 기계화, 자동화의 현실은 오히려 노동시간을 축소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세계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는 한국사회가 꼭 모색해야 할 일이다. 노동시간의 축소가 자칫 노동임금의 축소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조세와 복지 정책으로 '사회적 임금'을 늘릴 수도 있다. 기계화, 자동화도 인간의 몫이다. 이것을 어떤 맥락에 배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인간의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다.

앞으로도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노동이 수많이 남아 있다. 기계가 어린이집을 운영할 수는 없다. 트랙터 뒤에 나락이 떨어지듯, 농업이나 단순노동도 일일이 기계가 다 맡을 수는 없다. 문화예술 관련 프리랜서, 전문직, 숙련노동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한국은 세계에서 기타를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로 꼽히지만, 이를 우러러 보는 기타 애호가는 없다. 기타는 역시 장인이 만들어야 제 맛이라는 얘기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장 조레스. 유럽 진보정치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힙니다. 프랑스 노동자의 대변자로서 거리 곳곳에 그를 기리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노동절을 맞아, 우리 모두가 단순육체노동을 나눠지고, 모두가 교육을 통해 숙련 및 전문노동자가 되고, 모두가 남는 시간에 프리랜서로서 자신의 로망이 걸린 작업을 하고, 우리 모두가 농민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이러한 꿈은 물론, 생시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 우리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배턴을 이어받아 여전히 존재하는 노동억압과 비정규직 차별을 뚫고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