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부터 2005년 3월까지 군복무를 했습니다. 처음 입대해서 훈련을 받을 적에는 최전방 부대로 갈 줄 알았는데 훈련소 동기 240명 중 100명이 전투경찰로 발령났습니다. 강원도에서 충주경찰학교로 향하면서 "강원도 안녕"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다시 강원도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강원도에서 전경대와 파견대 생활을 번갈아 했습니다. 파견대는 파출소 및 지구대에서의 일선치안현장 근무를 뜻합니다. 제가 발령난 곳은 횡성이었습니다. 안흥파출소에서 주민들이 심심찮게 가져다주시는 안흥찐빵을 질리도록 먹으며 시작된 생활.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의 어둑한 실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농촌은 도시보다 더욱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따금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땅을 사서 이주하는 중상류층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특히 거기서 저를 분노케 한 것은 첫번째 가정폭력, 두번째 버려진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제가 주간정책발표 가운데 '어르신과 어린이가 행복한 구미'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것도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목격한 바 가정폭력이 빈번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철이 빨리 들고 중학생쯤 되면 폭력을 행사하는 어른을 제지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구부러지게 자라지 않아 사건현장에서 철수할 때 일말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연이 기억납니다. 밤중 신고를 받고 산골짜기에 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폭력남편이 사라졌으니 피해자께서 "천천히 오셔도 된다"고 했지만 길을 찾느라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가는 데 30분이나 걸렸습니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고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친자는 아니지만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세 남매가 있는데,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아이들 하나하나의 처지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며칠 지나 우연히 읍내장터에서 그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저런 사건 현장에서 분노와 함께 느꼈던 것은 무기력함이었습니다. 직원이 아니라 대원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이러한 사건을 수습하는 건 경찰의 책무지만 결국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제가 공부한 것이 주민들의 살림살이와 자존심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은 생각했던 그대로 가고, 어떤 것은 바꾸어야 했습니다. 흔히 군대를 다녀오면 보수화된다고 하지만, 저는 그 거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민들의 현장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됐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풀어줄 테니까 니맘대로 먹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돈의 자유, 돈의 독재'였습니다. '쌀개방을 할 거니까 농민들은 알아서 잘 하시도록', '공부를 빡세게 시켜줄 거니까 다른 불만 갖지 말도록', '어르신 복지? 기다려봐. 일단 돈부터 불려놓고 보자.' 이런 게 바로 신자유주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군복무 전에도 시민운동을 했지만, 제대 후에는 조금 다른 활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활동을 하자는 다짐 말입니다.
군생활에서 보람되었던 점은 까마득한 제 후임들이 제게 보내준 마음에 있었습니다. 제가 제대한 이후 간부들이 설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후임들이 '제대한 사람 중 가장 친한 고참'으로 저를 꼽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후임들은 저랑 '짬'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후임들이었습니다. 1년 이상 기수 차이가 나면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자대 문화에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찾아온 후임의 전언을 들으며, 간만에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수행하는 선거사무원이 '어떻게 골목을 이렇게 잘 뚫고 다니냐'고 감탄을 했습니다. 또 '신동을 각별하게 챙기는 것 같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전투경찰 시절 경험 그리고 농촌치안현장에서 제가 배운 것에서 우러 나온 것입니다.
강원도에서 전경대와 파견대 생활을 번갈아 했습니다. 파견대는 파출소 및 지구대에서의 일선치안현장 근무를 뜻합니다. 제가 발령난 곳은 횡성이었습니다. 안흥파출소에서 주민들이 심심찮게 가져다주시는 안흥찐빵을 질리도록 먹으며 시작된 생활.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의 어둑한 실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농촌은 도시보다 더욱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따금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땅을 사서 이주하는 중상류층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특히 거기서 저를 분노케 한 것은 첫번째 가정폭력, 두번째 버려진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제가 주간정책발표 가운데 '어르신과 어린이가 행복한 구미'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것도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목격한 바 가정폭력이 빈번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철이 빨리 들고 중학생쯤 되면 폭력을 행사하는 어른을 제지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구부러지게 자라지 않아 사건현장에서 철수할 때 일말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연이 기억납니다. 밤중 신고를 받고 산골짜기에 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폭력남편이 사라졌으니 피해자께서 "천천히 오셔도 된다"고 했지만 길을 찾느라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가는 데 30분이나 걸렸습니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고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친자는 아니지만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세 남매가 있는데,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아이들 하나하나의 처지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며칠 지나 우연히 읍내장터에서 그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저런 사건 현장에서 분노와 함께 느꼈던 것은 무기력함이었습니다. 직원이 아니라 대원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이러한 사건을 수습하는 건 경찰의 책무지만 결국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제가 공부한 것이 주민들의 살림살이와 자존심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은 생각했던 그대로 가고, 어떤 것은 바꾸어야 했습니다. 흔히 군대를 다녀오면 보수화된다고 하지만, 저는 그 거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민들의 현장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됐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풀어줄 테니까 니맘대로 먹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돈의 자유, 돈의 독재'였습니다. '쌀개방을 할 거니까 농민들은 알아서 잘 하시도록', '공부를 빡세게 시켜줄 거니까 다른 불만 갖지 말도록', '어르신 복지? 기다려봐. 일단 돈부터 불려놓고 보자.' 이런 게 바로 신자유주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군복무 전에도 시민운동을 했지만, 제대 후에는 조금 다른 활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활동을 하자는 다짐 말입니다.
군생활에서 보람되었던 점은 까마득한 제 후임들이 제게 보내준 마음에 있었습니다. 제가 제대한 이후 간부들이 설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후임들이 '제대한 사람 중 가장 친한 고참'으로 저를 꼽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후임들은 저랑 '짬'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후임들이었습니다. 1년 이상 기수 차이가 나면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자대 문화에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찾아온 후임의 전언을 들으며, 간만에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수행하는 선거사무원이 '어떻게 골목을 이렇게 잘 뚫고 다니냐'고 감탄을 했습니다. 또 '신동을 각별하게 챙기는 것 같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전투경찰 시절 경험 그리고 농촌치안현장에서 제가 배운 것에서 우러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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