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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Columnist

'자치' '전국' 잊은 '분권'의 귀결

신공항 건설이 결국 백지화되었습니다.

밀양 유치론자와 가덕도 유치론자들은 그동안 뜨거운 공방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한 공격논리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바닷가 허허벌판에 무슨!"
"어허, 산을 몇개나 깎나?"

그런데 처음부터 이 논쟁은 참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우선 '영남 신공항' 자체의 필요성이 충분히 전국적으로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여러 공항들이 지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중 상당수는 KTX 개설로 인해 효용성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람직한 영남 신공항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등, 이런 토론이 부각되는 게 아니라
대보름날 달이 뜨면 산이나 개울에서 패싸움을 벌이듯 그렇게 진행이 되어 왔습니다.
여기에는 미디어의 잘못이 대단히 크다고 판단합니다. 지역언론만 보면 이성적으로 판단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영남 5개 시도는 모두 '지방분권' 논리를 내세웠고, 백지화가 '수도권 이기주의'라고 공격했지만,
이것이 전국적으로 설득을 얻기는커녕 '영남 지역(패권)주의의 우격다짐'으로 비쳐지도록 흘러갔습니다.
지자체 민자사업이 아니라 국책사업이라면 전국적인 논리를 가졌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엉성한 '분권운동'은 분권의 상위 가치인 '자치'를 철저히 망각하였습니다.
신공항이 들어설 경우 생계와 주거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밀양 농민과 가덕도 어민들은
서발턴(말할 수 없는 자)으로 전락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군대 주둔으로 한의 세월을 겪다 끝내 주한미군 기지 문제로 쫓겨나버린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과거 모습이었습니다.

영남 곳곳이 신공항 유치 기세를 올렸지만 정치권, 관료, 기업인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이것은 '강건너 비행기 구경'에 지나지 않았기도 했습니다.

생태계 파괴는 아예 뒷전이었습니다. 4.6만점에 가덕도는 1.7점, 밀양은 0.6점이었는데
지금도 경제성만을 논의하느라 언급이 드뭅니다.  

지방분권은 방방곡곡의 주민들과 그 자치를 위한 방편입니다. 그 자체로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공항 이외에도 대다수의 분권론이 이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더 큰 책임은 중앙정부에 있습니다.
개개인의, 가가호호의 민생에 신경쓰기보다는 지역구도에 파묻혀
여기는 뭐, 저기는 뭐, 이렇게 떨궈주는 정책을 썼습니다.
과학벨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공항이 철회되자 과학벨트를 영남권에 나눠주자는
발상을 선보이는 게 현 정권입니다.
R&D가 4세대에 접어들었다고들 하는데 2세대 방식의,
제2차세계대전 당시 맨하탄 프로젝트 수준인 방식으로 과학을 부흥시킨다는 게 바로 과학벨트입니다.

요즘 석패율제를 도입한다는 말이 돕니다.
어느 지역에서 국회의원 후보가 패배해도, 그 당의 후보 중 가장 아깝게 패배한 사람 몇몇은 당선시켜주는 제도입니다. 
의석은 몇개 나눠가지겠지만 지역구도는 여전합니다. 되레 강화됩니다. 
지역구도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은 지역구도를 잊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남과 호남의 지역독점은 해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원화되고 있는 유권자의 생각이 의석을 바로 반영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지, 겨우 몇석을 떨궈줘서
동서구도를 깨겠다는 석패율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느 지역이든 우리는 노동자 서민의 표를 얻겠다" 
"어느 지역이든 우리는 사회통합의 명분에 호소하겠다"
좌든 우든 이제 이런 원칙에 입각한 정치를 해야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지 않는 정치세력은 점차 외면당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다수 국민들이 모든 당파로부터 등을 돌리고 투표를 기권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추상적이고 특수한 가치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 비-수도권에는 '수도권 규제완화'의 시련이 닥치고 있습니다. 
지역의 노동자도 자본가도 모두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은 이를 반대하지만 
한나라당 수도권, 당권파, 청와대는 이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관료들의 행정능력이나 로비로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역량이 모든 걸 좌우합니다. 
이 역량은 어디서 나올까요? 

전국의 모든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과 해설, 
그리고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는 일부가 아닌 기층 주민들의 관점과 연대입니다.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무심한 거리에서 화려하고도 무색하게 걸린 플랜카드,
인기몰이식 정치플레이는
이제 그만입니다.

읍소하다가 실패하면 삐쳐 돌아서는 그런 모습도 금물입니다.
생색내고 시늉하느라 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