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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씨의 선거 평가>

<김수민 씨의 선거 평가>

 

김수민은 이길 거라고 확신을 갖지 못했다’. 선거가 끝났으니 뒤늦게 털어놓는 진실이다. 그리고 김수민을 가장 괴롭힌 것은 당연히 당선될 거라는 세간의 예측이었다.’ 하나 더, ‘김수민은 2년여전부터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선거에 접어들면서 자신감을 회복했지만, 그 오랜 비관 때문에 졌다.’

 

2985표를 얻어 13.46%. 구미시 마선거구(인동, 진미) 녹색당 김수민 후보의 득표율이다. 3명을 뽑고 8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5. 2위와 0.7% 차이며 3위 당선자와는 0.6%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세간에서는 석패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1위 표의 절반도 득표하지 못했다. 이것은 완벽한 참패로 후보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1위와의 현격한 차이는 한국정치의 구조적 원인 때문이겠지만, 근소하게 낙선한 것은 오롯이 후보자의 책임이다. 후보자는 미디어 노출도가 높았고 소수파로서는 기대 이상으로 공약을 달성했다. ‘현역 프리미엄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민 후보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진 쪽도 파괴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조직력이었다. 여기서의 조직력은 인원을 동원해 이끌거나 선거 전초전에 순회할 술자리를 마련하는 그런 류의 조직력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가리키는 조직은 입조직이다.

 

선거기간 내내 김수민 후보를 괴롭힌 것은 당연히 된다라는 소문에 있었다. 이 소문에는 양적 근거가 부실하고 질적 근거가 어렴풋했다. 무엇보다 후보자는 낙관론을 퍼뜨린 적 없다. 후보자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상임선대본부장격으로 활동한 선본원도 그점을 지적한 바 있다.

 

후보자는 선거가 후반에 접어들며 상황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지자에게 먹히지 않았다. 후보자는 김수민 후보에게 호감이 있지만 당연히 당선될 것이라고 보니 따라서 (인맥, 지지 정당 등의 이유로) 다른 후보를 찍어야겠다는 표심을 끌어모으고자 했다. 많은 분들이 최선을 다했고 지지자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지지 표심을 획득해 나갔다. 하지만 후보자와 상황 공유가 되지 않았다. 평소에 친밀하고 효과적인 조직을 구축하지 못한 김수민 후보 본인의 책임이다.

 

0.6%차 낙선이라고는 하나 이 차이도 따지고 보면 선거운동으로 쉽게 좁히기 힘들다. 문제는 4년간의 활동에 있었다. 세 가지를 놓쳤다. 첫째, 선거운동 기간에서 확인한 결과 뜻밖에 상인층의 호감도가 높았다. 낮으리라는 후보자의 예측과 평소에 주위에서 듣던 전언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적지 않은 상인층이 후보자를 일을 많이,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의정보고서를 접한 비중도 가장 높았다. 그러나 상인층 호감도를 과소평가한 후보는 어처구니없게도 그간 상인층에 대한 스킨십을 강화하지 않았다. “상인층에게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자책감만 있었을 뿐이었다.

 

둘째, 인동주민센터에 관한 대응이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오던 무렵 구미시와 지역주류세력은 재빠르게 인동주민센터 입지를 마무리해놓고 있었다. 절대 다수의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장소였고 계획을 대충 알던 주민들도 그렇게 높은 곳인지 몰랐다고 나중에 털어놓는 사례가 허다했다. 지역현안에 깊은 정보가 없이 의원부터 되어버린 후보는 주민을 조직화하고 연대해서 반대할 타이밍을 놓쳤다. 2012년 초 지역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2013년 여름 주민센터가 개소한 사이의 1년을 반대운동 없이 허비했다. “나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있게 나서지 못하고 시민단체에 대응을 주문했지만 시민단체는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후보는 고지대 인동주민센터로 여론상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고 선거기간에도 반대하는 후보로 꼽혔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반대 주민들을 조직화해서 밀실행정을 심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후보의 잘못이다.

 

셋째, 2012~2013년을 위해 준비한 모종의 아이템을 써먹지 못했다(향후 구미 녹색당 활동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할 사업이므로 그 아이템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겠다). 김수민 의원실은 이미 단수피해 시민소송, 학교무상급식, 진평파출소 신설 등의 서명운동으로 의정활동 전반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다음에 준비한 아이템이 결행되지 못했던 데에는 폐기물수거 사영화와 같은 중대 현안에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반기 길거리운동이 피로감과 방심을 동시에 가져온 원인이 크다.

 

인동동, 진미동은 원룸이 많은 데다 동네를 떠날 계획을 가진 주민이 많은 동네로 현역 프리미엄역시 지극히 제한적이다. 의정활동 후반기를 장식할 길거리 기획의 부재는 선거에 악영향을 끼쳤다. 구미 녹색당은 경북 유일의 비정규직 권리보호조례를 구미시에서 제정한 중심이다. 그러나 이 조례 제정은 시의회 원내의 활동에 그쳤을 뿐 비정규직노동자와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이뤄지지 않았다. 언론의 호평을 받은 공원농약 발암물질 폭로소식도 널리 공유되지 못했다. ‘불산사태 지역 긴급재난구역 지정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후보자가 등장한 지상파 전국뉴스는 녹색당이라는 이름을 빼버림으로써 녹색당의 인지도 제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녹색당이 전국정당으로서 인지도가 낮지만 구미 지역만큼은 예외로 만들 수 있는 호기들도 많이 놓쳤다. 구미 녹색당이 해낸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중심을 녹색당이 아니라 김수민에 두었다. 녹색당이 다른 지역보다 조금은 구미에서 인지도가 높기는 하다. 그러나 녹색당을 먼저 접한 것은 녹색당을 지지할 만한 시민이 아니라 지역정가 뉴스에는 밝지만 녹색당 지지도는 낮은 보수층들이 많았다. 이 보수층조차 새정치연합에는 열어주지 않는 마음을 녹색당에게 내어주는 광경을 선거기간에 종종 목도할 수 있었으나, 선거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후보자가 4년 전 당선되었을 때 얻은 21% 득표율은 당시 인동, 진미 지역 범야권 지지율에 비하면(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득표율 기준) 6할 정도에 불과했다. 후보자는 민주당(현 새정치연합) 지지자들 상당수가 그 정당의 마크를 박고 있지 않으면 야권 내지 진보 성향 후보라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그렇지만 이번에 새정치연합 바람을 뒤집지는 못했다. 물론 구조적으로야 녹색당의 낮은 인지도, 중앙정치 뿐만이 아닌 지방자치에 관한 광범위한 무관심 때문이겠지만, 새정치연합 후보에 0.5%차로 뒤진 것은 후보자 스스로가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패인이 결코 선거운동의 강도나 방식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수민 선본은 새정치연합 후보 출마에 대비해 두 가지 방면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첫째는 2, 30대가 많은 유흥가 선거운동의 전개였다. 손님들 일부, 특히 취객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선거운동방식임을 알았지만, 달리 길은 없었다. 반응이 괜찮았기에 더욱 멈출 수 없었다. 아마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득표율은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둘째, 선거공보물이다. 공보물을 읽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만 이왕 읽는 사람은 만족스러운 공보물을 원한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축적된 정책공약을 구겨넣어 책을 한 권 읽은 듯한”(한 지지자의 표현) 느낌을 주었고, 마지막 면에는 새정치연합에 대한 비교우위를 표현하려 범야권의 신망이 높은 조국 교수, 후보자와 오랜 인연을 가진 홍세화 언론인(노동당의 전신인 진보신당 전 대표), 2007년 대통령선거 레이스에서 만났던 노회찬 전 국회의원(정의당)의 추천사를 받았다. 짙은 진보 성향의 유권자 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도 호응이 있었다.

 

그 밖에도 장날에 열었던 거리 연설, 연설 앞뒤에 펼쳐진 후보자의 노래, 정책대안의 선구자이자 기득권층과 맞서 싸우며 버스를 타고 다니고 원룸에 산다는 것을 알린 선거벽보, 젊은 유권자의 호응을 겨냥한 그린 라이트’, ‘그린 라이트가 그려진 현수막(“더 나은 구미를 만납니다”), 4년만에 재등장한 전동자전거와 타요를 닮은 리어카가 달린 또다른 자전거, 계층, 세대별로 따로 제작된 3종의 명함세트, “구미의 제1야당은 녹색당임을 알리는 종반기 명함까지 선거 기획에서 김선본은 각고의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위에서 지적했듯 결국 두 가지, 의정활동 후반기에 의원을 더 크게 알릴 수 있었던 실천의 부족 그리고 새정치연합에 비해 너무 낮은 정당 인지도에 발목이 잡혔다. 후보자는 사전투표가 마무리되고 지지세가 정체 또는 하락세에 들어갔다고 직감했다. 4년 전 선거에서는 가파른 상승세만 느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운동한다고 무리하지 마라. 당신은 당선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넓고 깊은 분위기를 후보자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별로 냉담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냉담한 사람들. 그들은 이미 새정치연합에 사전투표한 사람들,이라는 불길한 예상을 후보자는 갖고 있었다. 선거운동으로 파고들어가던 청년층에서도 묘하게 물길이 꺾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수민 후보를 잘 아는 40대 이상 유권자들은 새정치연합이 김수민 후보 표를 갉아먹는다고 판단했지만, 반대로 젊은 유권자일수록 녹색당 후보가 새정치연합 표를 깎는다고 여겼을 것이다(새정치연합 후보자는 4년간 조례를 단 한 건도 제정하지 못했다. 야당이 하기 마련인 '길거리정치'조차 제대로 한 적 없다. 그러나 그런 점을 유권자들이 알 리 없었다). 후보자는 그런 경향을 대비하고 있었고 선거운동기간 대부분에 특별히 느낄 일이 없다가 그점을 투표일 전야(63)에 확고히 감지했다. 후보자는 평소에 무조건 1번 찍는다고 어르신들 욕하지 마라. 2번 찍는 사람들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또 그것은 -지지대상이 1번이든 2번이든- 현재 한국 정치현실에서 특별히 뾰족하게 비판받을 일도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또한 사실 새정치연합 후보보다도 무소속 후보, 특히 국밥집 사장님이며 마라톤을 하는기호5번 후보에 더 큰 신경을 썼어야 했다. 전자는 구조적으로 상대하기가 버겁지만 후자는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가 있는부분이었으니까. 사실 새정치연합 후보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으며, 새정치연합 지지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으므로 응대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반면 7%를 득표한 5번후보와는 선거기간 중 예상 외로 표가 겹침을 실감할 수 있었다.

 

후보자 중에는 선거운동원과 대충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왕발이로 불리우는 기계에 몸을 실은 경우도 있었고, 유세차 자체를 없애버린 사람도 있었지만, 유세차량 대결에서 우리측의 자전거 2종세트’(전동자전거+리어카 자전거)에 강력하게 맞서게 된 것은 기호5번 후보의 마라톤이었다. 기호 5번후보는 처음 김수민 후보와 대면한 자리에서 되실 겁니다. 저는 한 번 선거를 해보려 나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그도 현실을 헛짚은 셈이었다.

 

주변 지지자 가운데는 5번후보가 아닌 다른 무소속 후보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후보는 물론 선본 핵심관계자는 결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누구를 라이벌로 보느냐는 질문에 김수민 후보는 “5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상대적으로 따지자면, ‘서민색채가 강하고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는기호5번과 가장 크게 겹칠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얼마간 적중한 듯하다. 기호5번은 가장 먼저 선거운동에 돌입했고, 아마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최초로 선거운동에 나섰다.

 

앞에서는 주로 패인을 의정활동에서 찾았는데, 선거운동 기간 중에서 하나를 찾자면 세월호 대응에 있었다. 애당초 김수민 선본의 폭발시점5월 초에 맞춰져 있었다. 4월은 큰거리 인사와 물밑 움직임 그리고 정책발표에 치중하고, 5월부터 학교 운동회를 돌고 어린이집 배웅 학부모를 만나며 그동안 지지해주었지만 인연은 없었던 학부모들을 조직화하는 과정이 5월 초중순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5월 하순부터 선거 끝까지는 투표할 의향은 있지만 지방정치에 무관심한 20대를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운동회가 모두 취소되고, 길거리 전략이 백지화되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니, 이제야 말한다. 김수민 선본은 구미역 시민분향소 설치의 단초를 제공한 단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암흑에 쌓인 분위기 속에서 그점을 널리 떠들 수도 없었다. 김수민 선본은 진평동 빠리바게트앞 사거리에 나와 아무 언어도 표식도 없이 촛불 하나를 번갈아 들며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그때 깨달은 것은 조금 늦었다’. 촛불시민연대는 구미의 서쪽에 위치한 구미역에서 대부분의 집회를 열었고 인동, 진미는 구미의 극동이었다. 시민분향소 설치 소식을 들은 기자는 김수민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왔으나 현재 후보라서 다른 사람에게 인터뷰해야겠다고 밝혔다. 김후보와 구미 녹색당은 이렇게 세월호참사에 대한 공식적이고 외형적인 대응을 모두 놓쳤다.

 

이때 구미 녹색당이 길거리로 나와 정당연설회를 펼치고 구미 동부 지역에서만큼은 녹색당 주도로 진상규명 서명운동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추모 분위기 때문에 후보자가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지만 정당이 나서는 것은 또다른 일일 수 있다. 구미 새정치연합은 시민분향소에도 촛불집회에도 아무런 참여를 하지 않았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시민분향소 차리는 사람 따로 있고, 표 주워가는 사람 따로 있더라고 밝혔다. 하지만 더 아쉬워해야 할 쪽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당, 우리 녹색당이며, ‘정당인 김수민의 실패가 낙선을 불러 일으켰다.

 

김수민 선본에 될 줄 알고 선거운동원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이야 선거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지만 낙선 직후에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아마 폭력사태를 일으켰을 선본원이 있었을지 모른다. 선본원들은 열심히 했다. 문제는 의원이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한다. 오히려 김수민 후보는 2012년 초부터 재선에 도전한다면 실패할 것이라고 느꼈다. 아마 그 생각 때문에 길거리 기획들이 좌초되거나 포기되고, 원내 활동에 좀 더 무게가 실렸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 때문에 졌다. 이번 선거의 패인을 선거운동에서 찾는 것은 무의미하며 방심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김수민 선본은 4년 전에 하지 않았던 술집 돌아다니기를 하며 그린 라이트를 들었고, 마이크를 들고 노래까지 불렀으며, ‘재출마한 전동자전거가 식상할까봐 사무실 부근 고물상에 마침 앉아 있던 녹색 리어카를 섭외했고, 4년 전에 4면에 불과한 선거공보물을 8면으로 늘려 창작의 고통과 고뇌의 진화를 담았다. 선거운동원들도 해볼 수 있는 건 다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선본의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선거운동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허망함 또는 깨달음(?)에 젖어 있을지 모른다. 본디 냉철한 성품의 후보자야 당선을 낙관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당선될 줄 알았고 그냥 열심히만 돌면 끝난다고 생각했던 한 천진난만한 선본원은 낙심이 어마어마하게 컸을 것이다. 후보자는 선거 마지막에 그에게 “5일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는 후보자에게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선본원들과 지지자들이 너무 낙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4년 전 김수민 후보가 얻은 4086(21.15%) 가운데 상당수는 이번 선거에서 젊은층이 다른 고려 없이 기호2번을 찍었듯 그 비슷하게 얻은 표가 많았다. 김수민 의원은 주인 잃은 표들을 꽤 긁어모아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2014년 김수민 후보는 달랐다. 13.46%는 그 어떤 후보들의 표보다 적극적인 마음이 모여 만들어졌다.

 

새정치연합 후보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은 마이너스 100%’로 쓸모 없다. 김수민 후보가 그에게 졌기 때문이다. ‘이번엔 후보자가 많아서 불리했다객관적 논평도 쓸데없다. 덕분에 오리지날13.46%임을 알게 되었고 조금은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녹색당 김수민 후보에 표를 준 시민들께 감사하다. 그리고 그 뜨거운 표심을 폭파시켜버린 낙선자로서 사죄드린다. 다만 김수민 후보는 애초에 의정활동도 사회운동의 일환임을 역설하는 정치인이었고 녹색당은 권력이 없더라도 지혜와 힘과 양심을 발휘하려는 당이 아니던가.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하고, 녹색은 지는 법이 없다. 김수민 후보는 이제 녹색당 활동가로서 또 풀뿌리 운동가로서, 무엇보다 이웃으로서 크나큰 빚을 갚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