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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 행정개혁

의원의 진정한 위상은 주민참여예산제로 올라간다

시에서 낸 허울 뿐인 주민참여예산제가 아닌
전국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주민참여예산제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주민참여예산제 수준이 높으면 시의원 권한이 약해진다"는 소문을
정작 시의원도 아닌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원과 주민들 사이를 이간질하겠다는 술책일까요? 
주민참여예산제의 활성화는 시의원의 위상을 강화시킵니다.


 



A와 B라는 주민이 있다.

A. 지방의원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알고 있다. 동네 자생단체의 회원이며 동사무소 문턱이 낯설지 않다. 그의 민원은 주로 도로 신설이나 재포장, 공원 체육시설 설치 등과 같다. 그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성향을 보이며, 그들끼리 모여 이야기할 기회가 많다.

B. 투표도 꼬박꼬박 하는 편이고 정치적 성향도 뚜렷한 축에 든다. 보육이나 복지, 교육 이슈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막상 지방의원에게 무엇을 건의해야 할지는 잘 모른다. 다만 행정이나 지방정치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사람과 만나면, 조금씩 자신의 견해도 정리가 되는 편이다.   

현재 지방정치는 B보다 A에 유리하도록 기울어져 있다. 지방의원의 활동방식도 그렇다.
이런 불균형은 시의원을 동의원으로 만들고, 행정은 개발주의에 젖을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는 민원을 활발히 제기하는 A의 입장이 더 크게 관철되는 게 공정한 듯하다.
그러나 B가 갖고 있는 어렴풋한 바람도 분명히 민원은 민원이다.  

지방의원이 민원을 접수받아 해결하는 과정은 민원인과 지방의원의 아주 단순한 Win-win을 만들어낸다.
민원인은 민원이 해결되어서 좋고, 지방의원은 민원인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해결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지기반을 굳힌다.
하지만 여기서 잊혀지고 묻혀지는 것들이 있다. 행정당국은 필요하고 합리적인 사안이라고 판단한다면 
굳이 지방의원의 요구를 받지 않더라도 주민이 직접 제기한 민원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밤길이 어둡고 으슥한 구역은 먼저 찾아내 알아서 보안등을 달 일이며,
미처 설치를 못했다고 해도 최소한 주민 요구를 받았을 때는 미루면 안 된다.
이걸 꼭 지방의원이 가서 요구를 해야 수용하거나 비로소 들은체한다면, 이건 구제불능 행정이다. 
민원이 해결되었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지방의원은 일반 주민에 비해 당연히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그것은 통장이나 주민자치위원과도 구별된다.
민원의 접수와 전달 같은 단순한 경로를 오가기보다는 
민원을 조직하고 주민들을 독려해야 '밥값'을 하는 처지란 얘기다.
의원은 산모 흉내를 내기보다 산파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불만 없다고요? 에이, 왜 없어. 잘 생각해 봐요"부터 시작해서 문제점을 포착한 다음,
교류하고 대화하면서 정책생산과정을 주민들과 공유해야 한다.
단순한 민원을 해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복합적인 대안을 창출해내는 경험은
서로의 몸과 마음에 깊숙히 남는다.
얼마 전 내가 했던 한 시정질문 내용은 어떤 주민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구체적인 방안을 짜내는 과정에서 그분과 중간중간 소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을 붙였고,
그것이 본회의장 시정질문으로까지 올라갔음을 본 그분은 굉장히 뿌듯해 했다.
나의 기쁨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런 일들이 공식적인 주민참여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의원의 등에 굳이 업히지 않아도 주민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고,
지방의원은 이것을 독려하면서 예전과 다르고 진전된 형태로 주민에 밀착한다. 
또한 의원은 동네 단순민원을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시 행정 전반을 깊이 해부하는 여유를 번다.

물론, 의원을 해보니까 단순 민원을 해결하는 일도 굉장히 재밌다.
대구 북구의 유병철 의원은 선거 유세 때 "구의원이 그저 가로등 다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그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가로등 다는 일은 보기에도 재밌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 재밌는 일을 의원이 독차지 하지 말자. 주민들에게 관철의 기회를 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내가 당선되자마자 처음 찾아온 동네 아저씨가 계신데, 살아온 이력이나 갖고 있는 양식 등으로 무척 신뢰가 가는 분었다. 그분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늦은 시간 함께 거나하게 마신 적이 있는데 이런 말씀을 해드렸다. "주민참여예산제도 시행될 거고, (구미에 아직 없는) 주민자치위원회도 구성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자치위원회가 없으니까 일단 동에서 하고 있는 발전협의회라도 가입을 해보세요. 직접행동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그분이 발전협의회에 가입해 거기서 제 목소리를 내시는 걸 보면서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예전 시의회에서 주민자치센터 조례를 보류하고 폐기시켜버린 의원들은 이런 짜릿함을 상상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의원께서 지나가는 말로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걱정을 표명한 적이 있다.
그러지 않아도 의원의 힘이 별로 없는데 그것까지 시행되면 의원이 뭐가 필요하냐고.
이 발언에는 특히 '재량사업비'에 대한 애착(?)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재량사업비'의 존재야말로 주민참여예산제를 반드시 실시해야 할 근거다.
재량사업비는 그냥 '흔히 하는 표현'이고, 좀 더 정식적인 어휘로는 편익사업비, 숙원사업비라고 할 수 있다.
세부 사업내역이 있는 것도 있지만, 여기서의 '재량사업비'는 그것이 없는 경우다. '포괄사업비'라고도 부른다. 
용처를 예산을 편성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는 없지만, 긴급하게 동네에서 써야 할 경우를 대비해 편성된 항목인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시의원의 쌈짓돈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원이 예산집행 기관도 아닌데. 
사정이 이러니까 일부 주민들은 "재량사업비 있잖아?"하면서 의원의 옆구리를 찌르기 일쑤다.
그렇다고 동장에게 맡겨둘 수도 없다. 의원이든 동장이든 전횡의 주체가 되고 몇몇 힘 있고
정보 있는 주민들의 매개체로 전락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여태껏 개혁적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항목의 예산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허나 없애는 것만이 개혁은 아니다. 주민참여예산제가 있다면 그렇다.
이 사업비의 내역을  동네 주민들이 지역회의에서 결정하면 된다.
민원을 받아서 의원이 용처를 결정하든, 주민들이 지역회의에서 민원을 제기해서 관철이 되든, 
해결이 되면 결과적으로는 별로 다를 바 없다.
단, 의원이 생색내기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다.
아니, 양쪽 다 생색내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 생색내기의 수준과 내용이 다를 뿐이다.
"내가 해결했다"와 "해결하는 과정을 독려해서 주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의 차이가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지방의원으로서 폼 나는 일인가? 난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뭐가 잘못됐나? 

난 어제 카카오톡 의정보고를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시가 높은 수준의 주민참여예산제를 하겠다고 해놓고 낮은 수준의 조례안을 내놨다"고 일러 바쳤다.
그중 어느 분의 응답은 이랬다:
"뭐... 밥숫가락 더 올리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진짜 상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진짜 상 주인에게 숟가락을 드리는 것!  
지방의원에게 이 이상의 일이 어디 있는가?
가오는 후까시와 다르다. 후까시가 아니라 가오를 잡을 거라면,
주민참여제도만큼 지방의원의 위상을 살리는 정책은 없다.


추신: 주민참여예산제가 활발히 시행되는 지역에서는 주민 요구가 관철되는 비율도 높지만
주민 스스로가 요구를 철회하는 비율도 낮지 않다.
이중엔 물론 외압(?)에 굴해서 철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 내 요구보다 더 급하고 필요한 사안도 있구나' 하면서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관철이 되든 자진철회하든 이런 기회가 주어질 때 주민들은
소외되거나 방관하지 않는,
또는 그냥 목소리 높여 떼쓰는 데 의존하지 않는, 
진정한 지역의 주인으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