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내 원칙은 첫째, ‘다녀온다였다. 둘째, 외유성 연수는 안 된다. 연수를 내실있게 소화한다면 누구에게든 욕 먹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의원들과 단체로 의회에서 잡아주는 일정을 소화하는 것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외유성이 아니더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연수에서 얻는 성과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의회 전체의 프로그램을 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둘째,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수를 간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넷째, 1년이 아닌 2년에 한 번을, 임기내에 2회를 다녀온다.

 

그런데 기초의원의 연간 해외연수 예산은 1인당 180만원이었다. 이 금액으로는 동북아나 동남아 지역 밖으로는 나가기 어려웠다. 고로 자비 부담을 한다는 것을 다섯째 원칙으로 세웠다. 이러한 원칙을 담아서 <경북일보>에 기고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연수 지역을 설정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주민참여예산제의 1번지 뽀르뚜알레그리(브라질), 협동조합의 도시로 유명한 볼로냐(이탈리아), 교통혁신으로 국내에도 크게 알려진 꾸리찌바(브라질)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현지 공무원들은 한국에서 찾아온 지자체 관계자, 지방의원,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안내를 하느라 상당히 지쳐 있다는 후문을 들었다.

 

하루는 다른 지역 지방의원에게 같이 연수를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독일에서 기후변화 관련 회의에 참석한 다음 영국에서 사회적기업을 탐방하는 일정이라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특히 독일의 회의는 만35세 이하 청년 지방의원에게 참가비를 면제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제안을 한 의원도 나도 모두 이 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기억이 어렴풋한데 아마 연수단 구성 자체가 무산되었던 것 같다.

 

시기를 잡는 것도 어려워 나는 번번이 연수를 떠나는 데 실패했다. 결국 4년동안 단 한 번도 의원 연수를 가지 못했다. 2010년 가을, 다른 의원들 대다수는 몽골과 일본으로 나뉘어져 연수를 다녀왔다. 나를 뺀 모두가 간 것은 아니다. 황경환 의원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했고, 김성현 의원은 당시 해외연수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윤영철 의원은 지역에 현안이 많다는 이유로 그해는 연수에서 빠졌다.

 

한편 KEC 사정은 차도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주요 현안으로 부상했지만 사측은 교섭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하며 실질 교섭과 무관한 간사 협의만 형식적으로 진행했다. 1015일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들에 섞여 회사 앞에서 시청 정문까지 삼보일배를 했다. 특별히 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땅에 이마를 대는 중간중간에도 무념무상과 잡념을 오갔다. 정문앞 마무리 집회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더 이상 할 말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사측은 삼보일배가 아니라, 일보삼배로 사죄하라"고 외쳤다.

 

KEC지회는 물리력을 거의 동원하지 않고 지극히 평화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여성 조합원들이 많았다는 점도 큰 이유였을 것이다. 영남권 집회니 민주노총 집회니 대규모 집회가 회사 정문앞에 벌어질 때마다 밀고 들어가야 하지 않나라는 목소리도 노조 안팎에 있었다. 지나는 시민들 중에도 공장을 점거하든지 해야지, 정문앞에서 농성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는 논평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결국 KEC지회는 공장 점거를 택했고 일부 조합원들이 공장안에서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1030일이다. 금속노조 구미지부 김준일 지부장이 분신을 시도했다. 그날 저녁 7시쯤 김 지부장은 KEC 교섭대표와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사복 경찰이 들이닥쳐 김 지부장의 체포를 시도했다. 조합원들이 연행을 막으려 저항하다가 연행당했고, 김 지부장은 여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몸에 지니고 있던 신너를 자신의 몸에 끼얹으며 항전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치지 않고 여자화장실 문을 깨고 진입했고, 이때 김 지부장은 불을 당겼다.

 

이를 두고 사측이 위장교섭을 제안하면서 경찰이 함정을 판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KEC 공장은 전장이 되었다. 무장한 경찰병력과 노동자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홍희덕 의원,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 민주당 홍영표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의 방문이 잇따랐다. 나도 분신 사건 당일 밤에 KEC 정문으로 향했고 비어 있는 경비실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에 있는 동네행사 어르신 걷기 대회도 불참한 채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나중에는 권영길 의원을 비롯한 몇몇 정치인들도 천막농성장에서 취침했다.

KEC 노사 갈등은 요즘 흔히 일어나는 정리해고 사태가 아니었다. 단체협상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던 타임오프 문제는 노조에서 먼저 철회했던 차였다. 그런데도 사측이 지극히 불성실한 교섭으로 일관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사측도 이런 사측은 처음 본다고 말하곤 했다. 30일 밤 집회 발언 때 나는 몹시 화를 냈다. 특히 어리석고 위험한 작전을 벌인 경찰 쪽을 향한 분노가 거세었다.

 

파업 현장에는 언론도 속속 나타났다. 그중에는 내가 2009년 말에 잠시 일했던 칼라TV’도 있었다. 스탭 중에 처절한 기타맨크롬이 구미를 찾았다. 내 원룸을 하룻밤 숙소로 내주었다. ‘크롬은 공교롭게도 인동동 내 구평동 부영아파트 쪽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다.

 

내가 농성장을 잠시 비운 동안 남유진 구미시장, 구미갑 지역 김성조 국회의원, 구미을 지역 김태환 국회의원 등 소위 구미 정치 3’와 김용창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이 방문했다고 한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이 중재를 위해 구미를 오가는 사이에도 이들은 정말이지 한 것이 없었다. 국회의원 지역구 제도를 회의하게 만들 정도였다. 조합원들이 맹렬히 항의하자 남유진 시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한다. 구미 경실련도 성명서를 발표해 예전 노동쟁의 때 수차례 노동복지과 직원을 보내 중재 노력을 했던 김관용 전 시장(현 경북도지사)과 남 시장을 대조했다.

 

이즈음에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었다. 남유진 시장과 재계 리더들이 KEC 파업 지도자들의 구속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구미시의회 의장단까지 끼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1110일 의회 첫 시정질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KEC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리고 남 시장의 수수방관을 비판하기로 했다. 시정질문은 국회의 대정부질문과 비슷하다. 집행부를 출석시켜 질문을 하고 답변을 얻는 행위다. 회의 용어에서 질문질의과 구별된다. 질의는 상임위 등에서 출석한 공무원에게 앉은 자세로 묻는 것이지만, 질문은 사전에 신청을 하고 답변할 공무원을 불러내야 한다.

 

그런데 구미시의회 시정질문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국회 대정부질문은 일문일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질문이 가능하다. 서울시의회 등 여러 지방의회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구미는 일괄 질문-일괄 답변이었다. 그것으로 부족하면 보충질문-보충답변을 조금 더 하고 끝나는 수준이었다.

 

1110일 나는 구미시에게 그동안 우리 구미시는 KEC사태의 해결과 노사갈등의 중재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나?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는 노동과 자본의 갈등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요지의 시정질문을 했다. 나는 현장에서 느끼지 못했으나 한 지역언론은 분위기가 경색되었다고 전했다. 답변대에는 남유진 시장이 섰다. 남 시장은 그동안 사측과 노조, 노조 가족대책위와 면담을 했었고 구미시의 주선으로 8차례 실무협상이 이루어졌으나 노사측 서로간의 입장만 확인했을뿐 의견차이로 협상이 빈번이 결렬 되었다고 밝혔다.

Posted by 김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