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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17) "어머님, 게임을 한번..."

201010월부터는 인턴 보좌관을 채용했다. 선거를 도왔던 친구 김광일 군이었다. 회의나 여타 일정 소화로 풀뿌리사랑방을 비울 때가 많아 보좌관이 필요했다. 또 보좌관을 두면 능률이 얼마나 오르는지 실험도 해보고 싶었다. 보좌관이라고 하나 지방의회에는 정식 보좌관 제도가 없었고 당연히 인건비도 나오지 않았다. 나의 사비를 털어야 했고 두둑한 급여를 줄 수가 없었다. 50만원쯤부터 출발해서 나중에 70만원까지 올렸다. 근무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자율 근무를 시행했다.

 

많은 월급을 줄 수 없어 공개채용할 수가 없었고, 이 급여로는 아마 공개채용에 응하는 사람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검증한 바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김광일은 나의 중고등학교 동창이며 인동동 관내의 황상동 토박이다. 정치 분야에서 활동한 바는 없지만 성실하고 친절한 성품이었다. 업무파악 속도도 빨라서 특별히 공을 들여 교육하지 않았다. 김광일은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근 시간을 정해주지 않아도 일찍 나와 사랑방을 지켰다. 차가 있어서 급할 때 얻어타기도 편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대다수 시민과 괴리되어 있는 의회에서 외롭게 활동하는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광일이 들어오면서 의정활동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도 점차 민원이 들어왔다.

 

처음 임기가 시작되고 사무실을 열자 의원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밀려왔다. 원룸에 홀로 사는 어느 어르신이 방문을 요청했다. 돈이 없어서 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원의 지역구내 기부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원룸에 거주하다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는 바람에 낭패를 본 한 아저씨가 찾아온 적도 있다. 의원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밖에도 의원보다는 법률적 구조를 받아야 할 민원들이 줄을 이었다.

 

선거 때부터 나를 자주 찾았던, 매우 곤궁한 처지의 아주머니가 하루는 아이들이 돌을 던진다며 호소했다. 잠시 생각 끝에 학교에 전화를 걸어 교감 선생님과 통화했다. 내 직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네 주민이라고만 소개하고 아이들이 어느 아주머니께 돌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색출하고 그러지 마시고,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만 한번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며칠 뒤부터 돌 던지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가장 황당한 민원이 있다.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와 남편이 몇 년 전 바람을 피운 여자와 다시 바람을 피우고 있는데 그 여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지금도... 듣고 있어요. 나를 감시해요.” “?”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안 들리는데...” “잘 들어보세요. 들리시죠? 지금 그 여자가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어요.” 아마 그 순간 내 표정은 가관이었을 것이다. 그는 남편이 그 여자를 만나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졸지에 심부름센터 직원이 된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까지 할 시간이 못될 것 같아서요.” 그는 그래도 가능하면 해달라고 했다. “어딜 가면 촬영할 수 있습니까?” “00아파트요. 우리 집 근처요.” 알았다며 겨우 돌려보냈다. “... 제가 그 앞에 지나갈 일 있으면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엉뚱한 에피소드도 있지만, 동네에 활동가가 하나 생기는 것은 곧 근처 이웃들이 방문하고 상담할 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실상 상점, 교회, 학원 등이 이런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의원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는 둘째 문제였다. 마을로 들어온 이상 나는 1차적으로 동네 사람이어야 했다.

 

또 언젠가는 아들과 불화를 겪고 있던 한 어머님이 찾아왔다. 세 식구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고 더 사이가 나쁜 건 아버님과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이 부모 앞에서 자꾸 욕설을 하고 농땡이 치는 친구들과 어울려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여느 집처럼 아이가 게임에 열중하고 부모가 꾸중을 하는 생활도 되풀이되었다. 사랑방 앞에 교육상담을 한다고 붙여놨지만 나라고 딱히 방법이 있겠는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기는 했어도 하등의 전문성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듣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뭐, 라디오방송에서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를 진행하던 음악인 신해철도 어차피 상담전문가는 아니었지 않은가. 내 나름의 시각과 해법으로 그가 들려주는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고 궤뚫어보기 시작했다.

 

부모든 교사든 권위를 세우기 좋아한다. 수직적 구조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와 제자도 여기에 호응을 해버린다. 반항을 하면서도 부모나 교사를 완벽한 어른으로 설정해놓는 것이다. 이것부터 깨지 않으면 나쁜 상황이 되풀이된다. 나는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자녀가 욕설을 쓰면 도덕적으로 훈계하거나 어른앞에서 입을 놀린다고 꾸중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욕을 하시면 심정이 어떻습니까?” “당연히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씀을 해보십시오. ‘네가 험악한 말을 하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다. 엄마한테는, 엄마 앞에서는 참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 학생이 어떤 인물인가 어머님에게 여쭤 이리저리 탐색해보니, 당시 부모님은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겠지만, 평범하고 착한 성격이었다. “애가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다는 것도 어머님의 큰 걱정이었는데 다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재밌어 한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꿈이 많을 것 같지만 꿈이 없는 게 비정상은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쩌면 꿈 없이 세상을 살아보는 것도 환상에 젖지 않고 인생을 구상해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었다. 또 봉사활동을 재밌어 한다니 그런 학생이 악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술담배를 하는데 이 학생은 하지 않는단다.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주변에서 어떻게 놀든 거기에 휩쓸리는 부류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는 큰 근심거리가 아니었다. “집에 가서 아버님한테도 말씀을 해드립시오. 괜히 아이 모습을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지금도 그리 심각한 상태가 절대로 아닙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더 심각해집니다.”

 

그래도 당장에 게임에 빠져 있는 건 좀 고쳐주고 싶다고 했다. 역시 게임은 난제중의 난제였다. 인터넷이든 핸드폰이든 빠져버리면 헤어나기가 어렵다. 나는 체벌이나 두발 규제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컴퓨터와 핸드폰은 조금 다르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컴퓨터를 없애버리는 극약 처방이나 PC방 출입을 막는 강제조치는 할 수는 없었다. “게임을 배워보겠다고 하시죠.” “어떻게요?” “그냥 네가 하는 게임, 얼마나 재밌냐. 나도 배워보자고 가르쳐달라고 하십시오.” “안 가르쳐주면요?” “졸라야죠. 부모라고 자식 못 조르겠습니까. 아버님도 꼭 같이 하시죠.” 내 심산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게임을 배워보며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고, 하나는 실제로 부모가 게임을 배워 자식이 독차지한 컴퓨터를 해방시키려는 거였다(흐흐).

 

어머님은 내게 아이를 사무실로 보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왔다.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의원님이랑 닮았어요.” “그렇습니까?” 얼마 지나 정말로 학생이 찾아왔다. 순순히 오는 걸 보니 역시 모자 관계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나와 그다지 닮지는 않았고 신체 사이즈만 비슷했다. 학교 다니며 겪는 어려움을 물어보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기성세대와 학교문화를 욕했다. 그의 표정에 남은 약간의 긴장감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그에게 나는 사랑방에 있던 만화 <20세기소년>을 빌려줬다. 다 읽으면 다음 권을 빌려야 했기에 몇 차례 더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보면 볼수록 유순한 소년이었다.

 

몇 달이 지나서 어머님이 가족관계에 이제 별로 걱정이 없다고 하셨다. 당시 고2였던 학생은 2012년에 대학에 진학했다. 회계 쪽 전공이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는 제 전공을 선택한 사유로 간단하게 적성에 맞아서 선택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어머님이, 그때 진짜로 게임을 배우셨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