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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8) 집회 도중 졸지에 '록커 시의원'으로 데뷔

7월 1일 저녁, 금속노조 KEC지회가 주최한 문화제에 참석했다. 용역에게 기숙사 농성장을 침탈당한 그들은 회사 정문앞에서 농성중이었다. 듣던대로 여성 조합원들이 많았고 첫 만남이었지만 총각 시의원을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직장폐쇄 사태 직후 곧바로 포지션을 잡았다. 어찌 보면 조합원들은 투쟁을 하고 정치인은 중재를 서는 것이 맞는 듯도 하다. 그러나 나는 초선의 기초의원이었고 중재 시도는 사치였다.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는 시의원으로 처신을 분명히 해야 했다. 그래야 시장이나 국회의원의 중재를 이끌어낼 여지도 있는 법이다.

 

대학 다니며 가끔 노학연대 활동에 동참할 때도 집회 발언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날 마이크를 건네받아 마음껏 연설했다. 선거 때 한창 펼쳤던 강성 연설이 되살아났다. 이후에도 그랬지만 노동자 집회에서 내 연설은 노동자보다 더 강경한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연설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투쟁의 중심은 해당 현장의 노동자였고 내 역할은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조합원들은 혹시나 시민들이 덮어놓고 자신들의 투쟁을 욕할까봐 신경이 쓰이거나 주눅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함께하는 시민들과 정치인이 있음을 연설로 상기시키고자 했다.

 

연설이 끝나니 조합원들이 갑자기 노래를 시켰다. 문화제에 장기자랑 순서가 있어 노래방 기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같이 온 김성현 의원부터 시켜달라고 시간을 번 후 어디로 잠시 도망가 있을까 했는데 김 의원은 이미 집회장을 뜬 후였다. 나는 개그맨 허경환을 흉내내며 “아~~ 이래서 김성현 의원이 사라졌구나”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부르던 헤비 메탈로는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올드한 록을 불렀다. 송골매의 <세상만사>를 부르자 앵콜이 들어왔고 봄여름가을겨울의 <미인>을 불렀다. “노동자가 이겨야 시민이 이긴다”는 구호로 내 순서를 마무리지었다. 한 조합원이 다가와 “시의원으로 데뷔하는 겁니까, 록커로 데뷔하는 겁니까”라며 농담했다. 집회에서 노래를 부른 건 그때가 유일했는데 아직도 그때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날 문화제는 당선 이후 어지럽던 나날을 정리하고 활동을 본궤도로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기득권세력에게는 공개적인 선전 포고였다. 이튿날부터 내게는 “KEC 집회를 방문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사적 인맥을 통해 들어왔다. 딱 잘라 거절하자 “그러면 가서 연설하거나 노래하지는 말아달라”고도 했다. 다시 노래할 기회는 없었지만 연설은 이후에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구미를 어떻게 바라보든, 수구꼴통의 도시라고 보든 말든 간에, 구미도 공단 지역이고 노동운동이 한때는 제법 번창했었다. 식당에서 가서도 가끔씩 예전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했다는 주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노조운동의 정치적 과실은 보수적 노조인 한국노총이 먼저 챙겨갔다. 한국노총은 이미 유수의 지방의원을 배출하고 있었고, 정당공천제 이후에는 한나라당을 통해 소속 인사들을 정치권으로 데뷔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이들은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노동자 전반을 대변하기보다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챙기는 데 골몰해 있었다.

 

구미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민중당을 통해 선거에 도전했지만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당시에 1선거구 1명 선출(소선거구)제도 때문에 공단 동네에서도 의원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정치적으로 단결했던 것도 아니다. 상당수가 정치세력화보다는 현장투쟁에 훨씬 큰 무게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들까지 정치세력화에 가담한 계기는 단연 민주노동당 창당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구민중당계와 새로 들어온 민주노조 관계자들 사이에 균열과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진보정당운동은 보통 자주파 대 평등파의 갈등을 겪는데 구미는 양상이 달랐다. 그리고 한편으로 2000년대 들어 민주노조는 거듭된 탄압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노조 활동이 왕성한 시기가 아닌 그것이 쇠락하던 시기에 나는 시의원이 된 셈이었다.

 

물론 노동운동의 그늘은 한국노총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고질적인 파벌 갈등으로 자신을 갉아먹는가 하면, 급증하는 비정규노동자와 중소기업, 하청노동자들을 껴안지 못했다. 구미의 일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핵발전 축소, 이자제한, 사회보험 개혁 등의 진보 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민주노조들도 있었다. 노조운동은 꽃 피우기도 전에 잎을 떨어트리는 신세였다.

 

그러나 구미 같은 공단도시에서, 개혁과 진보를 이루는 상당한 힘이 노동자들에게서 나오는 것도 엄연한 진실이었다. 절대 평가를 하기 앞서 상대 평가를 하자면 진보정치를 민주노조 조합원들만큼 지지해줄 수 있는 시민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안정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기도 전에 KEC지회처럼 이미 결집해 있는 노조조차 탄압에 직면하고 있었다.

 

나는 노동운동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한계는 재구성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인으로 서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기득권세력은 내가 KEC지회와 연대하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동시에, 나와 노동운동의 연관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내 프로필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내가 청년유니온(15~39세가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민주노총 산하 경북일반노조에 가입해 있다는 사실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나와 노동운동과의 연관을 두고 미주알고주알 욕하고 흉을 보느니 아예 그것을 없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의도된 전략이었을까. “민주‘노동’당 소속 아니잖아요?” “김 의원 노조에 속해 있나?”와 같은 뒷북 질문도 있었다. 시의원이 되고 1년쯤 지나기 전에는 그랬다.

 

의회는 의장단 선거가 끝나고 상임위 배정에 들어갔다. 의장을 제외한 의원들은 기획행정위원회와 산업건설위원회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의회 회의록을 보면 상임위에서 의원들의 직책은 ‘의원’이 아닌 ‘위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논의는 상임위에서 이뤄진다. 이외에 의회운영위원회도 있었는데 이는 기획행정위원이나 산업건설위원 중 선임된 일부가 겸임하게 되어 있다.

 

기획행정위원회는 총무, 예산, 복지, 교육, 문화 등을, 산업건설위원회는 건설, 경제, 노동, 농업, 환경 등의 분야를 담당한다. 나는 1차적으로 진보 성향으로 함께 분류되던 민노당 김성현 의원과 논의했다. 나는 기획행정위원회로 김성현 의원은 산업건설위원회로 방향을 잡았다. 전반기는 그렇게 하고 후반기에는 교대하려는 게 내 희망이었다. ‘건설’ 쪽에 상대적으로 취약해서 당장에 산업건설위로 가는 건 내키지 않았으나, 후반기에는 노동 분야를 담당하는 산업건설위로 가고 싶었다.

 

같은 지역구(인동, 진미) 의원들과도 논의했다. 의회 차원에서도 같은 지역구 의원이 모두 같은 상임위를 가지 않는 것을 전제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전반기에 기획행정위로 가겠다는 결심이 확고했고, 김태근 의원은 산업건설위를 강력히 희망했다. 상임위는 겸임 금지의 제약을 받았다. 가령 주유소나 건설업체나 식당의 업주는 산업건설위원회로 갈 수 없었다. 김태근 의원은 한때 그 세 업체를 모두 거쳤으나 당시에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산업건설위를 희망했던 윤영철 의원은 기획행정위원회로 바꾸었다. 그렇게 해서 의장을 뺀 22명 의원의 지망 내역을 모은 결과 기획행정위와 산업건설위가 똑같이 11대11로 편성되었다.

 

의회 사정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한마디씩 거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업건설위가 동네 발전에 더 유리하다고들 한다. 모르는 소리다. 이런 발상이 지역구 건설사업을 난개발로 이어버리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사업을 하더라도 굳이 산업건설위원이어야 성사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동네 사업 중에도 기획행정위원회 소관에 드는 사례가 있었다. 가령 인동 지역의 강동문화복지회관 건립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