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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의정활동 4년

(3) 행사 불참에 차 없음까지 트집을 잡히다

나는 행사장을 다니면 다닐수록 ‘이러려고 정치에 투신했느냐’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인터불고 호텔에서 코스요리를 두고 아쉽게 돌아서기는 했으나 ‘의원님, 의원님’ 하는 대접부터 붉은 카펫, 박수 소리, 외교적 언사들이 모두 마뜩치 않았다. 아 이것이 바로 ‘부르조아 정치’인가. “정치인들이 회의와 연구에 매진하거나 낮은 자세로 주민을 만나지 않고 행사장에서 얼굴이나 비치고 간다”는, 의원이 되기 전 들었던 불만이 내 귀로 덮쳐왔다. 나는 행사장 참석을 가려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참석을 거절한 첫 행사가 구미상공회의소의 시의원 당선자 초청 행사였다. 구미상의는 보수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성향이 농후해 보였다. 민주노동당 소속 김성현 당선자는 내게 “나는 가지 않겠다. 김 당선자는 그래도 한번 가보라”고 말했다. 김 당선자야 지역에서 오래 노동운동을 하며 상의와는 대립각을 세웠던 입장이었고, 나는 그런 구원이 없으니 일단은 가볼 만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러나 반대로 생각했다. 당시 나를 대하던 보수 세력의 분위기로 추측컨대 상의는 나를 노동자·서민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대표자로서의 위상이 서면 그들도 내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더욱 당당히 그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민주노조와의 연대 활동이나 노동 정책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나서는 상의 행사에 가보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번번이 일정이 맞지 않았고 나도 적극적으로 참석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그리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불참 통보에 상의 관계자는 역정을 냈다. 다짜고짜 꺼내는 말이 “제도권에 들어왔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이들이 나를 시험 대상으로 보고 있구나.’ 분노가 치밀며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관계자는 그뒤 여기저기 “김수민 의원이 이렇게 우릴 빨리 실망시킬지 몰랐다”고 떠들고 다녔고, 모씨는 “김수민은 빨갱이다. 젊은 사람이 정치를 해도 그런 좌파는 하면 안 된다”고 뒤에서 욕했다. 상의와 가깝게 지내던 어느 시민단체 간부마저 “정치인답지 못하다”고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역시나, 불참하기를 잘했다.

 

6월 15일, 두 달동안 정 들었던 선거사무실을 나오게 되었다.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1층부터 4층까지 비어 있는 썰렁한 건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나올 때가 되니 2층에 술집이 들어섰다. 나중에는 1층에 식당이 들어왔고, 지금은 그런대로 꽉 찬 빌딩이 되었다. 처음 사무실을 잡으며 건물주를 만났을 때 그의 표정에는 처치가 곤란해진 건물을 향한 근심이 꽉 차 있었다. 그에게 왠지 좋은 일을 해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4년 뒤 재선에 도전하며 입주한 건물도 텅 비어 있었는데 선본이 해산하면서 입주자들이 생겼다. “당락을 떠나 김수민이 입주한 건물은 잘 된다”고 내 멋대로 자부하고 있다.

 

선본 사무실을 나오며 인의동 667-13번지에 있는 건물 1층으로 옮겼다. 이곳을 지역구 사무실로 잡고 ‘풀뿌리사랑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무실 면적은 10평 남짓했고 월세는 당시 20만원이었다(후에 30만원으로 올랐다). 시의원이 지역구에 사무실을 두는 사례는 매우 희귀하다고 했다. 시의회에 의원 사무실이 있었지만 난 풀뿌리사랑방을 주요 거점으로 쓰기로 했다. 우선 인동과 송정동 시의회는 멀었다. 내가 송정동이나 형곡동 정도에서 활동하는 의원이었다면 따로 사무실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송정동에 틀어 앉게 되면 찾아오는 지역 주민들은 드물고 공무원들만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게다. 나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간판에는 ‘교육상담’도 하겠노라고 써넣었다. 동생이 자청해서 만든 간판 디자인이 썩 괜찮았는지 디자인 기획사에서도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나니 옆에서 자동차 광택센터를 운영하던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나는 투표를 안 했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기도 하지만 가게를 비워놓고 투표하기도 곤란해서요.” 바쁘고 부지런히 사시는 분이었다(후일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야구 동호회에도 나가는 등 여유를 찾으신 모양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김 의원 찍으셨어요.” 나중에 그분의 어머니를 만나 뵙고 나니 나를 지지할 만한 분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관해 그 또래 어르신 다수와는 사뭇 다른 견해를 갖고 계셨다.

 

그무렵 나는 의정비 문제로 고민중이었다. 후보로 나서면서 의정비를 “취업자 평균 소득만큼만 받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구미시의회 의원 의정비는 296만원쯤이었고 2008년 기준으로 취업자 평균은 203만원이었다. 주위에서 많이들 반대했다.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고 정치인도 사람인데 잘 받아둬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의정비 전액이 모두 보수 명목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보수에 해당하는 월정수당은 186만원 정도였다. 취업자 평균 소득보다 오히려 적은 액수였다. 나머지 110만원은 의정활동비로, 이는 연구비 및 자료수집비 90만원과 보조활동비(활동을 보조하는 사람에게 지급하는 비용) 20만원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 110만원 역시 용처를 묻지 않고 월정수당에 엎쳐서 한꺼번에 지급된다는 특성이 있었다.

 

당선되고 나서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의정비 인하에 반대하고 있었다. “당신이야 깎을 수 있다지만 다른 의원들은 부양 가족도 있는데 누가 동의해주겠느냐”고 나를 타이르는 사람도 있었다. 의원들의 일상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접대비로 한 달 월급을 다 쓰고 적자 인생을 사는 의원들이 숱하다더라”고 전했다. 경조사 부조비 지출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의원은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 기부행위를 하면 안 되며, 나는 4년간 단 한 차례도 기부행위나 '협찬'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 경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지방의원에게 눈총이 쏟아지는 후진적인 문화가 남아 있었고 숱한 지방의원들이 길흉사에서 지갑을 열었다. 의정비 인하는 의회에서 조례를 개정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의원들이 이에 응해줄 리가 없었다.

 

나는 결국 의정비 인하를 시도하는 대신, 이 110만원을 본래 취지에 걸맞게 의정활동에 할애한다는 방침을 내렸다. 그래서 자비로 시의원 사무실을 내 운영하기로 했고, 정책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도 넉넉히 구입하기로 했다. 첫해 가을부터는 인턴 보좌관을 채용해 얄팍하지만 활동비를 지급했다.

 

나는 의원 임기 내내 원룸에서 살았는데 월세가 20만원에 불과했다. 지역구 경조사에는 일절 기부행위를 하지 않았던 데다가 사실 나를 부르는 경조사도 얼마 없었다. 내가 평소에 돈을 쓰는 데는 주로 음반과 책이었는데 이것도 공무원들처럼 복지포인트로 결재를 했으니 현금 지출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통장에 들어오는 275만원 가량 가운데 매달 100만원씩을 적금에 넣었다. 선거사무장을 맡아줬던 한 친구는 “우리 나이에 월 백만원 적금 넣는 사람 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자가용이 없으니 기름값도 들지 않았다. 면허증은 있었지만 원래부터 차 몰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운전할 때마다 주차 걱정을 해야 한다는 점도 마뜩치 않았다. 구미는 버스노선이 무척 불편했지만 교통정책을 위해서라도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시청 후문에서 진평동이나 인의동으로 돌아오기는 쉬웠는데, 진평동 원룸에서 메가박스 건너편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게 다소 귀찮았다. 일정이 빠듯할 때는 택시도 자주 탔다.

 

하루는 동사무소의 어느 직원이 “의원님은 경차를 하나 구입하셔서 타고 다니면 되겠습니다. 이미지도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웃으며 “아예 차를 살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자가용 없이 사는 걸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동성이 떨어지는데 왜 그러느냐”고. 무슨 기동성? 행사장 쫓아다니는 기동성? 대충 동네 한바퀴 휙 도는 기동성? 물론 나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을 터이다. 이제 별의별 것으로 트집잡히는 나날에 돌입한 것이다. 나는 지역구내에서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