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복기, 의정활동 4년

(1)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이 되어달라"

2010년 6월 3일 새벽 3시경, 득표율 21.15%로 3위 당선이 확정되었다. 4위를 불과 130표차로 따돌리고 턱걸이로 당선하는 동시에, 1, 2위 당선자와 1, 2% 수준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개표 현장에 참관인으로 보낸 친구 둘이야 환호작약이었겠지만, 선거본부 사무실에 있던 사람 누구도 소리를 지르거나 손뼉을 치지 않았다. 담담한 승리였다. 남아 있던 운동원들은 이기는 것도 처음이었고 지는 것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선거는 이기는 것이 좋다. 선거 뿐이랴 모든 승부가 ‘승리냐, 패배냐’의 일차원으로 보자면 승리 쪽이 더 좋은 것이다. 공직에 앉아 포부를 펼치는 것은 나중의 일이라지만 선거를 추스릴 때도 당선자 쪽이 훨씬 좋다. 당장에 금전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이기면 보전 항목에 해당하는 선거 비용의 전액을 돌려받으므로 타격을 면할 수 있다.

 

으레 당선이 확정된 선거본부의 사무실은 갑자기 북적거리기 마련이지만 우리쪽은 그렇지도 않았다. 내 지지자 절대 다수는 나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음을, 또 후보자를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는 것을 미처 작심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실감했다. 4시경 진평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중년 남성 한 분만 찾아왔다. 그는 내게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후일 다시 만난 그는 내 당선에 그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기득권세력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그것은 ‘외로움 혹은 항복’이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가고 나서 선본으로 복귀한 개표 참관인들이 들고 온 감자탕을 놓고 소주 한잔 기울였다.

 

당선이 확정되지는 않고 ‘유력시’되는 수준이던 새벽 2시 30분경부터 문자 메시지가 빗발쳤다. 당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날이 밝아오자 이번에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친구나 지지자는 거의 없었고, 면식은 없고 이름은 낯설고 이름보다 기관명이 더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었다. 시의원이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자리였나? 나는 이런 것도 짐작하지 못한 채 선거에 뛰어들었던 초보 정치인이었다.

 

곧바로 아침거리에 나가 당선 인사를 해야 했지만 나는 선거를 마친 자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당선자로서의 처신 방법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과거 나의 선배들은 선거에 나가 10% 득표율을 넘긴 적이 없었고 나는 누가 당선 인사를 하는 광경이라고는 보지 못해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친구, 동생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일단 잠부터 들고 깨어나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선거 막판 급격하게 누적되던 피로가 긴장이 풀린 우리를 엄습했다. 돌아가는 길에 진평동 인의주공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이 선거 결과를 두고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접했다.

 

당선 인사는 오후부터 시작했다. 인동광장 네거리로 나갔더니 박태환 교육의원 당선자가 먼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퇴근길 차량들 입장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였다. “조금만 하고 비켜줄게요”라고 했지만 상당히 부지런한 그는 내가 ‘여기까지 할까’ 싶을 무렵에야 네거리를 떴다. 자리가 아까워 한동안 더 절을 했다. 상당히 많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중에 고급 세단은 하나도 없었다. 선거운동 때부터 이미 느꼈던 바지만 내 지지층은 예전에 볼 수 있던 진보파 지지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마다 가장 큰 호응을 보인 건 30대 남성 화이트 컬러와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비교적 내 지지층에는 블루 컬러와 영세자영업자층이 많았다.

 

3일 저녁 당선소감을 올렸다. 마지막 문단이다: “제가 시민 여러분의 거울이 되고자 했듯이 여러분들도 저를 비춰주셔서, 두달동안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어떠한 유력자나 주류 집단이 아니라 주민들께 인정받음으로써 4년 '기간제 노동자'인 의정활동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습니다. (...) 진보개혁노선의 대표자가 늘어나고, 지방의회에서 세대와 계층, 성별의 조화가 이뤄지기를 빕니다. 그러한 변화를 향해 4년동안 작고 깊은 풀뿌리정치를 펼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민 여러분들이 이기셨습니다.”

 

‘구미텐인텐’ 카페에서는 네티즌들이 당선 소식에 열화와 같은 환영사를 보내왔다. 블로그 방문객도 갑자기 불었고, 트위터 팔로우도 급증했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지지자가 별로 없는 대신 인터넷에서 갈채를 받은 것이다. 이즈음 축하손님 중에는 인의주공아파트에 사는 택시기사 한분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방문객이 드물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동네에 연고도 없이 예상 밖으로 당선되어버린 나를 생소하게 생각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거와 지지 후보의 당선 소식을 뒷전으로 하고 빠르게 일상으로 접어들었다. 나중에야 서서히 깨달은 이치지만, 나에게 투표한 사람 중에 나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선거는, 후보자와 유권자의 강한 일체감 속에 치러지는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괴리감 속에도 있다.

 

구미시의회 의원 선거는 결과가 나온 후 엄청나게 큰 화제가 되어 있었다. 일단,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에 실패했다. 23석 중 10석에 그친 것이다. 이것은 연합뉴스에서 특필하기도 했다. 친박연합이 4석으로 꽤 선전했고, 민주당이 1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7석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1명과 당시 무소속인 나, 이렇게 2명의 진보 성향이 포함되어 있어 한쪽에는 충격을 다른 한쪽에는 경사를 안겨주었다. 내가 구미시 역대 최연소이자 당시 영남 최연소 겸 전국 무소속 최연소(만27세)로 당선된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유의미했다. 구미시 집행부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나는 ‘두 명 가지고 뭘 그러시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집행부의 분위기에는 남유진 시장이 50%를 갓 넘기는, 한나라당 후보로서는 저조한 득표율로 재선했다는 위기감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한 방송사 기자가 나와 민주노동당 김성현 당선자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민주당 당선자는 섭외 대상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 기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민주당 당선자란 사람은 전화를 했더니 말도 못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치를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인터뷰가 불가능해 보였다.” 시청 앞마당에서 가진 그날 인터뷰에서 나는 양대 주요공약이었던 학교무상급식과 주민참여예산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확한 일자는 떠오르지 않지만 선거가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사무국 공무원이 찾아왔다. 당선자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의원이 받는 처우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비로소 곧 의원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6월 7일 오전 11시 구미시청 대강당에서 당선증 교부식이 있었다. 교부식이 끝나자 어느 재선 의원이 내 팔을 잡아끌며 대강당 아래층에 있는 의원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민주노동당 의원도 같이 붙들렸다. 그는 우선 이렇게만 말했다. “한나라당 아니시니까...” 그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으로 처음 의원이 되었다가 공천이 탈락한 후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때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구미 여론에 미루어 짐작하자면 그가 공천을 받아서 ‘1-나’나 ‘1-다’ 같은 기호를 받았을 경우 오히려 낙선했을 공산이 높았다. 낙천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 방에는 친박연합과 무소속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민주당 소속 의원은 그들이 놓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도의원이 앉아 있었다. 이 도의원은 한나라당 공천권을 행사했을 국회의원과 붙어서 이긴 처지였으니 표정에는 흥분과 득의가 만연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측하고 있었다. 단순한 내용이었다. “다가오는 의장선거에서 비-한나라당끼리 뭉쳐야 한다. 이렇게 꽉 뭉치면 안 될 게 없는데 꼭 이탈하는 사람이 생긴다. 앞으로 뭉치도록 하자.” 이를 듣는 나는 또 하나를 예측했다. ‘절대 뭉쳐지지 않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