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5th Columnist

[서평] 절반의 인민주권 / E.E.샤츠슈나이더

 

 

골목길에서 중학생이 초등학생의 돈을 빼앗게 될 때, 중학생은 어떻게 처신할까요? 사람이 별로 지나가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방 초등학생에게 조용히 하라고 겁을 준 다음 나중에는 “주변에 이르면 큰일날 줄 알라”고 협박하겠죠. 그는 최대한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익을 취하고자 할 겁니다.

 

반대로 돈을 빼앗긴 초등학생은 상대방이 처벌받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물론 중학생이 협박을 했기 때문에 남에게 알린다는 게 겁이 나기도 하겠지만, 선생님과 부모님과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안전해지려고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공공 장소’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겁니다. ‘사사롭다’는 말도 있지요? ‘공공화(公共化)’와 ‘사사화(私事化)’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학생은 사건을 사사화시키는 사람이고, 초등학생은 공공화시키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문제를 공공화시키려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문제에 끌어 들이고 보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합니다. 누가 어디서 돈을 뺏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고 또 지켜보게 된다면, 그 중학생은 돈 뺏기가 힘들어지겠지요? 이런 중학생 같은 사람은 문제를 지켜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합니다.

 

정치인은 문제를 ‘공공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치인이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어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가 하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주려는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정치인은 공개적인 곳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발언을 하기보다는 몰래 숨어서 일을 벌입니다. 돈 뺏는 사람이 으슥한 곳을 찾듯이 말이지요.

 

내가 2013년 11월 구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가진 강연 <정치란 무엇인가?> 중 일부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치의 본질이 갈등이며, 그 갈등을 공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본연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가 곧 갈등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가 일으키는 갈등에 혐오를 느끼고 있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단절되기 어려운 현상일 것 같다. 그러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을 강조했고, 1970년대에 사망한 그는 민주주의 정치학에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나의 이 강연도 그에 빚지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당파 싸움'에 환멸을 느끼며 '통합'을 요구한다. 정치인들은 결코 그 요구를 묵살하지 않는다! 그들도 툭하면 '통합'을 요구하고 선동하며, 저 많은 시민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한다. 그리고 그렇게도 통합을 역설하지만 정치인들은 숱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시민들이 투쟁이 아니라 통합을 외치는 것은 문제의 결과가 아닌 원인인 셈이다. 갈등은 인간사에서 사라지는 법이 없다. 갈등을 극복하리라는 환상이 낳은 '통합'의 실제 내용을 두고서도, 이 통합론과 저 통합론의 갈등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이럴 수 없다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또는 시민에게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갈등을 피해가거나 묻어버리려는 음모에 충실한 결과다.  

 

많은 시민들의 착각과는 다르게, 현시대는 갈등을 '사사화'하는 시대였다. 기업활동에 대한 자유방임주의, 복지 지출 확대에 대한 저항,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너희 복지는 너희가 돈 벌어서, 시장과 기업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라는 선전, 부자와 대기업에 적용되어온 감세, 정리해고와 불안정노동에 대한 방기와 묵인, 학생인권 규정을 학교장의 재량으로 돌리려는 교육계 일각의 시도, 사회경영보다 자기계발이 우선시되는 사회문화...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사적 영역으로 내모는 자세야말로 이 시대의 주류정치경제학이었다.

 

이러한 갈등의 사사화는 위에서 내가 거론한 '삥 뜯고 나서 가볍게 넘어가려는 중학생'에게 유리하게, '뜯기고 나서 전전긍긍하는 초등학생'에게 불리하게 전개된다. 여기서, 어지간한 사람은 친구, 교사, 부모님, 갈취 현장의 구경꾼 등 새로운 관여자가 나타나야 구도가 바뀔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갈등의 사회화이며 공공화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의 전염성과 외부자들의 참여를 중시했다. 또 그는 단순히 가시적인 갈등에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갈등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갈등의 치환'에 주목했다.

 

미국 정치학자의 논의로부터 잠시 한국으로 되돌아오자. 오래도록 한국 정치를 지배한 구도는 '지역'이었다. 한국 정치판은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독점하고 이에 기반해 지역을 분할하는 경향에 빠져들었고, 반대편에는 '지역주의를 타파'한다며 다른 대안이 아닌 지역주의에 똑같이 집중하고 지역주의를 역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계층, 계급, 성, 연령, 생태에 관련된 구도들은 정치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고, 정치는 시민의 살고 먹는 문제로부터 더욱 동떨어지게 되었다. 지역 구도가 낳은 갈등이 다른 갈등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결국, 지역구도를 극복하는 시도는 '지역주의 타파'가 아니다. 지역 구도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갈등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갈등의 치환'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의 문제를 사회화하고 정치의 쟁점으로 부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샤츠슈나이더는 일단 이익집단은 답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이익집단은 평범한 여러 사람들이 지향하는 공익을 두루 대변할 수 없을 뿐더러, 그가 통계로 입증하듯 이익집단이 정당에 끼치는 영향도 예상보다 매우 제한적이다. 예컨대 미국의 대표적 전국 노조인 AFL-CIO의 조합원수에 비해, 이 노조를 통해 미국 민주당이 새로 조직할 수 있는 표, 공화당에 빼앗기지 않고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표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공화당과 기업집단간의 관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익집단은 여러 갈등 중 특정 사안에만 몰입하는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려고 하면 모여 있는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어렵다. 또한 이익집단은 먹고 살기에 바쁜 시민들의 직간접 참여가 어렵고 상류층에 기울어지는 경향을 갖고 있다. 가령, 정부나 지자체가 관련 이익집단과 협의를 하겠다며 '참여의 장'을 열어놓을 때, 거기에 들어오는 이들은 날마다 다녀야 할 직장이나 학교가 없이 자신의 자본이나 재산으로 먹고 살기 충분한 이들이 될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따라서 민주주의를 이익집단들의 경합과 조화에 바탕을 둔, 미국에서 '다원주의'로 부르는 이론과 이념을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다.

 

샤츠슈나이더의 궁극적 대안은 바로 '정당'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만든 것은 정당이며,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정당은 갈등들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부여하면서 가장 큰 규모의 대중을 동원한다. 또 가장 많은 대중이 참여하는 '선거'라는 절차에서 이기거나 질 수 있는 주체라는 점에서 이익집단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그의 정당정치론은 인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그것이 없는 인민을 무지몽매하다고 보는 태도를 단호히 비판하는 것과 긴밀히 엮여 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들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기울일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전문가' 역시 어떤 문제와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조건으로 다른 문제와 분야에는 무지해지는 길을 택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을 무지하고 시민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태도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실은 노예를 배제한 특정한 '시민'들끼리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운영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인민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를 한국 현실에 적용해보면, 예컨대 '깨어있는 시민'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요건을 부여하면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을 저해하는 '자격증'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깨어있는 시민' 논의는 보통 사람을 위한 정치와 민주주의의 구성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정치참여자들이 도덕적 우월성을 느끼고 못미더운 동료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더욱 멀리 격리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인민의 주권을 온전히 실현시키고 시민들, 특히 바쁘고 각박한 시민들의 이해를 폭넓게 대변하고 조직하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유명부실한 정당이 어떤 정치를 만드는가는 한국에서도 뼈저리게 증명된 바다. 끊이지 않는 정치개혁 담론, 부적격 정치인을 걸러내려는 시민운동단체의 캠페인, 결과적으로 상당한 물갈이를 이룬 국회, '새정치'를 구현하리라는 인물에 대한 열광적 지지 등에도 불구 정치는 점점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기득권으로 당내 이견세력과 반대 국민을 제압해온, 위기 때는 이름이나 당 로고 색깔을 바꾸는 따위 쇼로 일관해온 한국의 정당들이 이 주범이다.

 

그나마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정당에 참여해오고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 시즌 6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후보가 당원 자택의 문을 두드려가며 선거운동에 나선다. 2개 정당이 정치권을 지배하는 미국과 달리,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 녹색주의, 시장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극우 등 다양한 정당들이 할거하고 있는 유럽이나 남미는 더 많은 시민들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두 거대 정당-새누리당, 새정치연합의 당원은 명목상으로는 수백수십만이지만 그중 당비를 내는 당원은 1/10 정도에 불과하다. 또 한 선거구에서 1명만 뽑는 소선거구제, 투표용지에서 우열을 만드는 기호 제도, 비례대표제의 낮은 비중 등은 제3의 정당이 선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이런 한국에서 있었다면 어떤 진단과 처방을 내놓았을까. 어느 학생과 그의 대화다.

"정치학자로서 자신이 개밋둑을 연구하는 곤충학자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세요?"

"아니. 그보다는 개밋둑을 연구하는 한 마리 개미 같은 기분이지."

민주주의에서, 정치학자든 보통 사람이든 '깨어 있는 시민'이든 정치인이든 모두가 똑같은 '개미'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지 않았다. 그 거꾸로다. 바쁘고 힘겨운 세상에 무엇을 함부로 요구하겠는가.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활용할 그 '개밋둑'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이야기할 시간을 아주 가끔은 가져보자. 비록 자신의 생각이 정치로부터 떠나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은 크지만, 자신이 비운 시간과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정당')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