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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나누기

<또 하나의 약속> 후기

1. <7번방의 선물>보다 더 들 수 있는 영화다. 만일 그러지 못히면 그 배경에 대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
1-1. 메가박스 구미점 목요일 20시 10분. 관객이 꽤 많이 왔다.
1-2. 상영관 없는 지역 중엔 구미보다 더 큰 도시들도 있다. 누구 고향이라 안 걸릴 거라 악담해주신 분께 감사하다. 긍정탔다('부정탔다'의 반대어?)!
1-3. 반도체 공정을 설명하다 나오는 두 음절의 그 단어. 구미 관객들에게는 특별한 장면이었다.
1-4. 이들의 지인들에도 특별한 영화이다.
故○○○ 여성, 삼성전자 구미공장 핸드폰 조립/납땜 7년간. 2005년 상세불명암 12월 사망.(28세)
故이상○ 남성, 삼성전자 구미공장 핸드폰 생산직, 재생불량성빈혈로 2000년 사망 (27세...)
김수○ 여성, 삼성전자 구미공장 핸드폰 검사직, 24세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진단.
1-5. 영화 나오기 전에 삼성 광고 나옴.
1-6. 삼성 관계자에게 아이폰 쓴다고 한소리 들은 적 있음. 갤럭시 나오기 전에 산 걸 어쩌라고.

2. <변호인> 볼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 초반에만 울컥했다. '저들이 어찌될지 뻔히 보이는' 입장에선 초반에 슬프지도 않은 장면에서 울컥하게 된다.
2-1. 후반부에서 울지 않은 건 원인이 내 안에 있을 뿐 다수 관객과는 무관한 현상일 듯.
2-2. 영화 개봉 이전의 과정이 더 드라마틱해서일지도 모른다. 이를 담아 <또 하나의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3. 온갖 것에 길들여졌던 관객을 별 기교 없이도 적응시키며 끝까지 밀고 나간다. 뚝심이다. 영화란 원래는 이런 것일지도.
3-1. 아쉬운 점은 스포일러랑 엮여 있어서 여기 적지 않겠다.

4. 슬픔의 영화지만 슬픔에 기대거나 눈물에 호소하지 않는다.
4-1. 신파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관객이 그런 인상을 간직하지 않으면 신파가 아니다. 내가 아니라면 그만큼은 아니게 된다.
4-2. 제목을 '약속'으로 바꾼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5-1. <변호인>과의 큰 차이: 송우석 변호사는 뒤로 갈수록 솟구치고 자연히 다른 인물들이 주변화된다. 부림사건으로 잡혀간 학생들까지 싹 다. (노무현이 구속당하며 도운 쪽은 학생들이 아니라 노동자였는데 그 영화에는 아예 드러나지 않는다.)
박철민과 그가 연기한 윤미아빠는 그렇지 않다. 화이팅 외치기 직전처럼 계속 손들이 포개어진다.
5-2. 박철민의 얼'골'을 제대로 봤다. 제대로 파였다. 배우는 역시 탈이 중요하다.

6. 중간중간 만화적이거나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놓기엔 조심스러운 말이다.
일전에 장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연극적이라는 세평에 "내가 연극이 아닌 설치미술을 전공했다면 다른 말이 나왔을 것"이라 대꾸했다. 깨갱... 어쨌든 나는 본 영화를 연출한 김태윤 감독의 전공이 무엇인지 모른다.

7. 법정드라마는 한국 영화의 블루 오션?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소수의견>이 얼마 전 크랭크업했다.
7-1. 인권은 법정에서? 이것은 정치나 사회운동의 부진을 가리킨다.

8-1. 정진영의 줄타기는 은근히 대단ㅎㅎ
8-2. 변호사로 나온 박혁권. 느낌이 좋다. 적당히 투철하거나 아니면 약간 비겁한 역할에 제격이다. 과장이 없고 담백하다. <의형제>에 나왔었다.
8-3. 김규리는 데뷔 초기에는 '가물치 닮았다'(<테마게임> 대사 중) 싶을 만큼 독특했는데 계속 예뻐지고 있다. 이번 연기는 예상보다 두드러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8-4. 많은 사람들이 얼마간의 무게감을 갖고 등장한다. 그러니 누구 몇몇이서 튀어버리지 않았던 게 옳다.

 

9. 직업병 문제에서 삼성자본은 자해를 하고 있다. 이건 전세계적인 문제고, 국내의 다른 기업에서도 나타나는 일이다. 중소기업 및 하청업체는 더 심각할 가능성이 있다.
죽을상 쓰고 "어떡해? 미치겠다"며 세상의 자문을 구하는 게 상책이다. 설령, 그 문제를 반도체산업은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극도로 불편한 진실을 파악했다 할지라도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딱 잡아떼다 비난을 온몸으로 껴안고 자빠지고 있다.
심지어 "삼성피해제보자 명단에 삼성 직원 아닌 사람도 끼어있다", "그 사람 삼성 사람 아니다" 이따위로 내부를 단도리질한다고 들었다.
나의 대답: "됐고!"
9-1. 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녹색정치, 녹색운동의 숙적이다.
9-1-1. 직업병 문제는 녹색노동운동이 복잡한... 사전고민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이되 어느 정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작년에 구미시 공원농약과 방역약품 성분을 조사했는데 학술연구가 아니라 검색노가다 수준이었지만 머리 아팠다. "나만 이런 경험을 할 순 없어!"
9-1-2. 영화에 나오는 반도체산업 기술이전 배경은 핵발전소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과 이치가 같다.
9-1-3. 그런데 탈핵에 성공할 경우 비중이 높이질 태양광산업 역시 반도체산업과 같은 직업병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9-1-4. 핵발전이든 반도체든 태양광패널이든 비릿할 만치 깨끗해 보이고 차가운 것들이 우리를 골병 들게 만든다.

10.
삼성은 누구의 것인가? 답하기 어려운가. 엔딩 크레딧을 수놓은 시민들의 이름들을 보라. 이 영화의 주인이 누구 한 명이라 답할 수 있는가. 없다면,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답할 수 있다.

삼성의 주인은 여럿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종업원들이 엄지에 꼽힌다.
삼성 노동자들이 주눅들지 말았으면 한다.
이번 영화로 소속사가 지탄을 받는 것이 본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건 아니다.
(제가 삼성재벌 욕했다고 페친 끊은 삼성 직원들이 예전에 있었다 하네요. 중학생들도 자기 학교 욕 먹는다고 그게 무조건 자기 명예훼손이 되는 게 아님은 알 텐데...)
스스로 또 하나의 약속을 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내 경험으로는,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은 세간의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성향을 갖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면서 무노조경영을 지지하는 입장, 이 둘 중 한쪽에만 해당되는 입장, 누구보다 문제를 잘 알고 비판적인 입장, 그리고 이 세 가지 분류에 환원시킬 수 없는 입장...
옳고그름을 떠나 그 모든 하나하나가 세상에 온전히 비쳐졌으면 한다. 다른 모든 생명이 그래야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