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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나누기

"언어영역 점수 나쁜데, 문학을 전공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을 참으로 좋아하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대학에서도 문학을 전공하고 싶고, 문학 교수가 되거나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도 성적표를 받아드는 순간 주눅이 듭니다. 언어영역 점수가 나쁜 것이지요. 국어교과의 내신 성적도 딱히 우수하지가 않습니다. 시험점수가 모든 게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또 아무리 재미있는 영역도 교과에 포함이 되면 재미가 덜하고, 그래서 자신이 성적이 나쁘다고 위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암기를 잘하는 학생이 언어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도 아닐진대 왜 저는 성적이 나쁜 것인지 한탄합니다. 아무래도 자질이 없는 걸까요?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입니다. 명색이 작가를 꿈꾼다는 제가 한때는 맞춤법과 띄어쓰기에도 어려워 했으니까요. 나름껏 열렬히 노력해서 현재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점수는 올라가지 않네요. 

일단 첫째, 성적이 나쁜 이유를 알고 싶어요. 제가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논리력과 분석능력이 떨어져서일까요?  
둘째, 뭐 까짓거 성적이 나빠도 괜찮습니다만, 이런 제가 문학을 전공할 수 있을까요?


반갑습니다. 얼핏 점수 올리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인 줄 알고 당황했습니다. 저는 그런 상담을 하지 않거니와 하라고 해도 못하거든요. 또 학교와 학원의 선생님들을 놔두고 제게 그런 요청이 들어올 리는 없고요. 또 본인께서 한편으로는 성적에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알고 계시죠? ^^

다만 한가지 점검은 해봐야 합니다. 본인이 읽는 책과 글 가운데 소설이나 시의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너무 높으면 곤란합니다. 님이나 저나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빼어난 '넌픽션 문학'이 수두룩합니다. 김성칠의 <역사앞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보다 덜 문학적이지 않습니다. 소위 논설문이나 설명문을 '비문학'으로 분류하는 헛소리도 잊으세요. 광고 카피, 대자보, 르포 등 우리는 다양한 문학을 접할 수 있습니다.

다양하게 읽지 않을 때 우리는 사물을 보는 여러 각도의 시각을 잃게 됩니다. 소설만 읽는 사람은 좋은 소설을 쓰거나 평할 수 없습니다. 또한 논리와 정서, 분석과 통찰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좌뇌가 좀 떨어지지만, 우뇌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감상적일 수는 있어도 감성적이기는 어렵습니다. 몸관리와 발성법은 익히지 않고 오로지 혼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좋은 가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어영역 점수는,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님의 점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또 현실에 있어서 되도록 점수를 올리는 것이 좋겠지만, 그 점수는 님이 문학을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못 끼칩니다. 저는 고교 시절 역사 성적이 엉망이었지만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여 지금 역사교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어른들 말씀 중에 "머리가 늦게 틔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기도 한답니다. 저야 조금 다른 경우기도 합니다. 학교다닐 적에는 역사가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교과서 안에 들어가 박힌 박제 같달까. 님 역시 그래서 점수가 높지 않을 공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언어영역 문제가 수험생의 문학성을 나타내는 잣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따금 과학이나 사회 교과에서 곧잘 복수정답 논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논란의 여지가 더욱 큰 것이 언어영역입니다. 딱 떨어지는 정답이 흔치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논란이 예상보다 많이 일어나지 않는 건, 복수정답이라고 들이밀 수 있는 또다른 '딱 떨어지는 정답' 역시 없기 때문일지 몰라요. 언어영역 점수가 높다는 건, 그 사람의 언어능력과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잘 눈치채고 문제의 패턴을 읽는 노하우가 높다는 뜻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재미난 일화를 들었습니다. 한 트위터리언의 스승이 시인이신데, 자신의 시가 지문으로 등장해서, 지문에 딸린 다섯 문제를 푸셨다는군요. 결과는 하나만 맞고 다 틀리셨답니다.

언어영역 점수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적 수련을 위해 수능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을 알려드립니다. 그 길은 아주 고전적입니다. 시를 외우세요. 버거우면 짧은 시라도 좋습니다. 그 시를 입에 올리고, 시와 함께 걸어보세요. 시의 리듬과 구조를 익힐 수 있습니다. 산문을 베껴쓰세요. 시간이 없으면 한 단락이라도. 손으로 쓰면 좋지만 안되면 컴퓨터를 빌어서라도 해보세요. 문체는 사유의 그림자입니다. 문장을 통해 작자의 사상 흐름과 논리 전개를 읽게 됩니다.

문학은 푸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들어야 비로소 문학입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언어영역 문제집을 잠시 서랍에 넣어두고, 시를 외우고 산문을 베껴써 보세요. 이 간단한 행위로 '문학 자유이용권'을 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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